비육지탄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연락을 못했던 2년 사이 인도네시아로 직장 근무지가 바뀌었고, 이번에 두 번째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고 했다. 비육지탄님은 내가 처음 가입한 산악회에서 만났다. 그 산악회 버스는 시내버스처럼 몇 개의 코스를 돌았는데, 비육지탄님과 나는 한동네에 살아서 같은 정류장에서 탔다.
비육지탄님이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쌀국숫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나는 군산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라며 월명산 아래에 있는 ‘커피 볶는 집’으로 안내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물었다.
“월명산 자주 가셨어요?”
“무릎이 아파서 못 갔어요. 퇴행성 관절염이래요.”
비육지탄님은 휴가가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세상에 월명산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산을 나만큼 어쩌면 그 이상 사랑하는 분이라 나는 속으로 안타까웠지만, 변심한 거냐고 했다. 그리고 월명호수를 끼고 완만한 산책로를 30분 함께 걸었다.
“역시 좋네요”
비육지탄님이 말했다.
다음 코스는 한길문고. 동네 쌀국수-커피 볶는 집-한길문고로 이어지는 길을 두고 나는 ‘돈없이도 이장 길’이라고 알려줬다.
한길문고에 들어서서 비육지탄님이 서가를 돌며 책을 고르는 사이 나는 미리 주문한 책 세 권을 카운터에서 결제했다. 이꽃님 작가의 <세상을 건너 너에게 갈게>와 황영미 작가의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은 초밥이 보다 한 살 어린 비육지탄님네 막내에게 줄 선물이고, 한 권은 내 걸로 주문한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이다. 저자의 전작 <회복탄력성>에서 배운 게 많아 고민 없이 샀다. 하지만 768쪽의 묵직한 책을 받아 들고 보니 다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첫 장을 넘기는 벽을 넘지 못함)
비육지탄님은 문학상을 받은 작가 두 명의 신작 소설을 골라왔다. 내가 딱 한 권의 소설을 추천한다면 바로 이거라며 책을 가져왔다. 바로 <불편한 편의점>이다.
“왜 이 책인데요?”
“골목 구석구석에 있는 편의점처럼 희망은 가까이 있다는 걸 뻔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하는데 재미있어요.”
책을 읽고 작가를 SNS에서 찾은 건 김호연 작가가 처음이었다. <불편한 편의점>이 2021년 4월에 나왔고, 내가 김호연 작가에게 팔로우 신청한 건 여름. 그때만 해도 김호연 작가는 “아직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에 책이 누워있다. 다행이다”라는 게시물을 올렸고, 내가 “이 책 더 잘될 거고 이런 소설을 써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댓글을 달았더니 김호연 작가가 고맙다고 했다.
그 해 연말, ‘예스24올해의책’ 수상 소식에 “축하드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온기가 퍼졌으면 좋겠어요”라는 나의 댓글에 “찐독자님 덕분입니다”라고 김호연 작가가 답했다. (지겨우시겠지만 저한테는 소중한 추억이라 조금 더할게요)
다음 해 <불편한 편의점>이 70만 부 판매를 돌파했고, <불편한 편의점 2>가 나온 걸 보고, 내가 다 뿌듯했다. <불편한 편의점 2>에서 이년 만에 ALWAYS 편의점을 찾은 시현이 편의점의 매출이 오른 걸 보고 안심했던 것처럼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불편한 편의점 2>에 새로 등장한 인물 ‘준성’과 내 이름 ‘준정’과 연관성을 찾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기도 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음)
<불편한 편의점>을 좋아한 이유는 상상력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현이 포스기 사용법을 유튜브로 올려 스카우트제의를 받는 일처럼, 취업에 성공하고, 가게 매출이 오르는, 눈에 보이는 한 가지 길 말고도 길이 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사치로 여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안쓰러워서 김호연 작가는 시현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달려가는 사람들 뒤에서 넘어진 사람, 다친 사람, 힘들어하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각자 서있는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썼다고, 이건 글쓴이의 삶과 일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불편한 편의점>의 독자라면 <망원동 브라더스>도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제목만으로도 노트북 앞에 앉게 하는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는 김호연 작가의 20년간의 분투기인데, 그걸 읽으면 <망원동 브라더스>와 <불편한 편의점>에서 김호연 작가가 보인다. 나중에 나는 김호연 작가의 브런치 글에서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가 7개 출판사가 거절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았다.
김호연 작가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말을 가지고 와봤다.
“좋은 작가가 되는 게 먼저다. 데뷔나 흥행은 그다음의 일이다. 작가적 삶을 살면서 이대로 살겠다고 받아들이면 기회가 온다. 하지만 ‘작가적 삶의 태도’가 먼저다.”
나에게 희열을 주는 일을 가진 사람이 그걸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그 끝에 얻은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득하고 먼 길이지만, 갈 수밖에 없는 나만의 이유를 찾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
산행이 일찍 끝나는 날, 비육지탄님과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고는 했다. 캄캄한 새벽에 나가 온종일 산을 오르고 난 하루의 끝에 마시는 맥주는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