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이는 시험기간 3주 전이 되면 초저녁부터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공부하고 아침에 피곤한 상태로 학교를 간다. 그런 생활이 누적되면 몸의 리듬이 깨져서 기어이 몸살이 나고 만다. 지난 시험기간에도 몸살이 심하게 와서 병원에서 수액까지 맞았다.
이번에도 시험기간 3주 전이 되자 초밥이가 편의점에서 2+1 커피를 사 왔다. 시험기간 루틴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1.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자기(학원 가는 날은 다녀와서 밤 9시부터 자기)
2. 밤 10시에 알람이 울리면 끄고 자기
3. 계속 자기
4. 아침까지 자기
원래는 3번과 4번 사이에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그냥 자는 것 같았다. 일단 잠을 쪼개 자면서 감기에 취약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인가? 몸을 괴롭혀서 심리적 죄책감을 덜려고 그러나?
몸살을 향한 항해를 시작 한지 4일째 날, 나는 방에 불을 켜놓은 채 자고 있는 초밥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초밥이는 2번에서 3번으로 이행 중이었다.
“일어나면 공부해야 하니까 일어날 수가 없잖아.”
눈을 감고 있는 초밥이 입에서 푸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건강까지 망치려 드는 거야?”
밤 12시, 초밥이가 여름청바지를 찾기 시작했다. 내 방까지 들어와서 서랍을 뒤지길래 내가 물었다.
“그 청바지를 입고 지금 해수욕이라도 가게?”
“아니, 일단 찾아놓으려고.”
지금은 11월 말, 무릎과 허벅지가 찢어진 그 청바지를 찾는다 해도 내년 여름이나 입을 텐데 찾아야만 하는 충동을 초밥이도 어쩌지 못하는 거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을 미룰 수만 있다면 그 일은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일이 된다.
공부하려고 앉으면 입지도 않는 옷이 생각나서 옷장을 뒤지는 일은 나도 많이도 했다. 초밥이를 보면 나의 과거를 이제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는 기분이다. 저런 건 건너뛰면 좋겠다 싶은 일도 디테일을 살려서 재생되는 걸 보면 인생이란 신비롭기 그지없다며 감탄하게 된다.
나: 일어나면 공부해야 하니까 일어날 수가 없고, 휴대폰을 끄면 공부해야 하니까 끌 수 없는 거잖아.
초밥: 맞아.
나: 겉으로 볼 때는 한가하게 웹툰이나 보고 있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초밥: 내 말이.
나: 하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애쓰는 게 진짜 대단해 보여.
초밥: 공부는 1도 안 했어.
나: 괜찮아. 네가 얼마나 괴롭게 뒹굴거렸는지 내가 다 알아.
나도 초밥이한테 충고할 입장은 못된다. 오늘도 글을 고쳐야 하는데, 노트북 앞에서 이런저런 고민만 하다가 낮잠을 자고 수업을 시작하기 삼십 분 전에야 일어났다. 부랴부랴 사람꼴을 하고 집을 치우느라 혼났다. 그럴 때 누가 옆에서 일을 미루지 말라는 말을 하면 도움이 될까. 나약한 나 자신을 참아내느라 용을 쓰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마구 삐뚤어지고 싶을 것 같다.
시간을 끄는 동안 그 일은 마음속에서 거대한 산이 되었기 때문에 시작은 더욱 힘들어진다.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다가 너덜 해진 정신으로나마 몇 줄 고치고 나면 내내 흐리다가 해가 반짝 나듯 아주 조금 용기가 생긴다. 그럴 때 잠깐 드는 생각, 조금이라도 하니까 마음이 편하구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해나가자,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릴 수 있다.
문제는 이 기특한 생각이 처음부터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온갖 한심한 짓을 다하고 난 뒤 더 이상 할 게 없다 싶을 때 겨우 굴 속을 기억나와 하게 된다.
초밥이는 지금 게을러서나 의지가 약해서 미루고 있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고 있는 중이다. 피하고 싶은 마음과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태평하게 자고 그러고도 휴대폰이나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와 아니다 사이에 힘겨운 줄다리기 중이다. 마음의 부침을 겪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소중한 기술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나와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