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둘째 고모부님이 간암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부고를 들은 다음날 새벽 첫 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장례식장을 갔고, 그곳에서 대구에서 올라온 부모님과 친지들을 만났다.
네 명의 고모 중 셋째 고모는 혼자 살고 있다. 어쩌다 결혼식, 장례식장에서 셋째 고모를 만나면 엄마는 그때마다 이렇게 인사를 한다.
“혼자 사는 기 외롭지예.”
그날도 엄마는 셋째 고모에게 이 말을 세 번을 하는 걸 나는 옆에서 들었다. 전에도 했는데 내내 무심코 듣다가 내가 혼자 사는 입장이 되자 그 말이 신경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그저 열 살이 많은 고모에게 몸은 아픈데 없으시냐고 하면서 인사로 하는 말인 줄 알지만 이상하게 거슬렸다. 우리 오마니는 자기 딸도 혼자 사는데 왜 저런 말을 할까 하고 있을 때, 아부지가 입을 열었다.
“시아버지 기일이 얼마 안 남았제? 보름 있으만 돌아온다 그자?”
나한테 시아버지가 어디 있다고 이건 무슨 소리지? 나는 두 눈에 물음표를 달고 아빠를 바라봤지만, 아빠는 내 눈을 피하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이 집은 제사를 안 지내고 음식 차려놓고 기도만 하거든.”
안물안궁, 물어본 사람도 없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아빠는 내가 남편 없이 혼자 장례식장에 온 것이 마음에 걸려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거다. 나는 아빠가 이럴 때마다 다 까발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어쩐지 장례식장에서는 내 민낯을 보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이때만이라도 서로의 아픈 부분을 꺼낼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부음으로 불려 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은 사람과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고, 남은 사람을 위로하고, 내게 주어진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기회를 포착했다. 입관할 시간이 되자 엄마와 아빠는 입관식에 참석했고, 나는 고모와 단 둘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고모는 내내 서울에 살았고 이혼을 한 뒤에는 한동안 친정식구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자연히 내게 셋째 고모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 본 고모는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식구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모습이었다. “외롭지예”같은 말에 불편한 기색 없이 웃으면서 그렇지 뭐,라고 하셨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리로 흘렀나.
나: 저희 엄마가 외롭지 않냐고 여러 번 말해서 불편하셨죠?
고모: 아냐, 괜찮아.
나: 저도 딸이 아빠한테 가서 혼자 살기 시작했어요. 혼자 사는 딸은 두고 엄마가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제가 다 민망하더라고요.
고모: 남편하고 따로 살아?
나: 8년 전쯤에 남편하고 헤어졌어요. 예전에는 이혼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심해서 힘드셨을 것 같아요.
고모: 그때는 그랬지. 그래도 지금은 편하고 좋아. 이제 언제 갈지도 모르는데 뭐.
나도 안물안궁 하나!
내가 만약 재혼해서 며느리 역할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 시부모 생신, 명절, 가족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적당한 역할까지 해야 한다면?
9년의 결혼 생활, 8년의 싱글 생활을 해온 내가 정리해 보자면, 며느리 역할이 힘든 이유는 특정 집안의 문제나 가족과의 갈등이 아니라 내 안에 잔존해 있는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자와 협의해서 기존의 싱글 생활에서 최소한의 변화만 준다 해도 과연 내 마음이 편할까. 삶의 주체로서 내가 원하는 삶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가 누군가에게는 의무를 저버리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아무도 비난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에게 어떤 사정으로(몸이 아프거나 산에 가고 싶다 등등) 명절, 생신에 못 간다고 하는 것처럼 시부모한테도 양해를 구할 수 있을까. 스스로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내 경험을 비춰보면 시어머니한테 전화를 하지 않는 기간이 일주일, 이주일 늘어갈 때마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전화를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도 내 마음이 그랬다. 한편 전남편은 우리 부모님한테 전화를 하는 데 대한 부담이 없어 보였다. 어쩌다 하면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워했다. 반면 나는 어쩌다 안 하면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함께 살아서 좋은 점이 있고, 내가 물려받은 문화 안에서 불화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며느리 입장에서의 노력이라는 것은 일방적이고 과중했다. 이삿짐에서 침대, 장롱, 냉장고, 세탁기가 빠져도 짐이 많은 것처럼, 며느리 역할이 아니라도 늙어가는 부모님을 챙기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 생계를 위한 일에서의 역할도 가볍지만은 않다. 나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며느리 역할도 잘할 수 있는 깜냥이 나는 되지 못한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군산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의자에 푹 파묻혀서 읽다만 책을 펼쳐드는데 이제야 나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혼자 남았을 때 행복감, 나한테 꼭 맞는 조촐한 만족감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새벽에 정류장 옆에 세워둔 차로 갔다. 차는 하루종일 내린 눈을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유리창에 제법 두텁게 쌓인 눈을 걷어내고 끝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은 보일러를 틀지 않았지만, 밖이 워낙 추워서인지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 때문인지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내 집에 돌아온 평온함처럼 혼자 산다는 것에는 그런 수수한 만족이 있는 것 같다. 가족이 있어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그 크기가 내 안을 가득 채울 정도라고 할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가득한 만족감. 이 기쁨을 절대 뺏기고 싶지 않다고 다짐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