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Feb 16. 2024

원하는 이름대신 원하는 삶

초밥이가 없는 삼일째 날이다. 설에 함께 부모님 집에 갔다가 돌아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초밥이를 새 집에 데려다줬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은 초밥이가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잠시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가 일상을 시작하면 잊어버리고 있다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문득 혼자라는 자각이 든다. 어젯밤에 침대에 누웠는데 화장실에 뭘 잘못 올려놓았는지 퍽 소리를 내며 떨어져서 기가 질리도록 놀랐다. 괜히 무서워서 현관문을 확인하고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안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십 년 전, 나는 늦은 밤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며 훌쩍이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 자주 했던 일이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를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일이었다.      


결혼한 지 이 년쯤 되었을 때 그중 한 명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곧 상견례를 하는데, 그전에 너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았어.”

“왜?”

“모르겠어. 마지막으로 확인 같은 걸 하고 싶었나 봐. 너는 아직 결혼 안 했을 것 같았는데 했구나.”

“뭐야, 너 진짜 나하고 결혼하고 싶었던 거야?”     


그가 무안할까 봐 웃으면서 던진 말에 그는 “아니, 널 구제하고 싶었어. 네 남편도 아마 그런 마음일 걸”이라고 했다. 내가 불안해 보여서 붙잡아주고 싶었다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자기가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앞으로 이런 말을 할 기회는 절대 없을 거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거라고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내내 친구로 지내다가 사귄 건 고작 한 달, 내가 헤어지자고 하자 사 년을 연락을 끊더니 어느 날 나타나서 “우리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자”라고 했던 사람. 하지만 나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떠올리면 흥이 나고 죽이 잘 맞았던 친구다.      


내가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지던 그 시절 종종 그를 생각했다. 만만한 친구 같은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갈등을 해결하는 것도 조금 쉽지 않았을까, 나의 불안한 부분조차 사랑스럽게 봐준 사람이라면 이런 차가운 기분은 들지 않았겠지. ‘00라면’이라는 가정을 할수록 나 자신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 너무나 좋은 상황이다. 아이는 남편이 데려가고, 나만 혼자 남은 데다 생계인 과외수입은 언제 끊길지 모른다. 당장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동행해 줄 보호자도 없다. 하지만 지금보다 삼십 대에 그토록 자기 연민에 빠진 이유가 뭘까.      


예전에 나는 ‘사랑받는 아내’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내 삶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그 완전무결한 이름에 비해 내 삶은 비루하고 결함투성이로 보였다. 사랑받는 아내, 행복한 가정이라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디서 주입된지도 모르는 가상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나와 내 삶은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될 수 없는 개별적이고 복잡한 존재인데, 그런 고유성을 부정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이름)를 붙들고 자기 연민에 빠졌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옛 인연은 자기 연민에게 붙들리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원하는 이름대신 원하는 삶을 그리고, 구체성을 더해갈 때 자기 연민에서 풀려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있는 자리에서 상상했던 그 삶을 살아나갈 때 이름은 따라오는 게 아닐까.     


나는 ‘많이 읽히는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많이 읽히는 책을 쓰는 작가’라는 이름대신 그 작가의 삶을 상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로 밤사이 굳어진 몸을 푼다. 미지근한 물에 레몬을 띄워 한 잔 마시고, 커피를 내린다.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들고 노트북을 켠다. 글을 쓰기 전에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고, 메모도 찾아보고, 전에 썼던 글을 읽어본다.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면 자판을 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면 글의 만족도와 상관없이 이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한다.  

    

바로 오늘 아침의 내 모습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름은 아주 천천히 올지 모르지만 혹시 오지 않을지라도 당장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게 느껴진다. 그 모든 게 아니어도 괜찮다는 기분까지도.


커피와 레몬물이 있는 아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