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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Feb 27. 2024

엄마 모공만 떠올려도 눈물났는데

엄마한테 내가 일 순위가 아니었으면

작년 12월, 초밥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함께 병원에 갔을 때다. 접수를 하고 돌아서는데 초밥이를 임신했을 때 가깝게 지냈던 H가 앉아있었다. 십 년 만이었다. 그녀와 나는 고향도 같고, 나이도 같아서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작은 임산부 요가원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의 임신, 출산, 돌잔치를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너무 격이 없이 지내서일까. 서로 다른 가치관과 경제 수준으로 혼란과 갈등을 몇 차례 주고받다가 결국 멀어지고 말았다.     


그 친구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데 반해 나는 신혼이라 쌓아놓은 게 없으니 풍족하지는 못했다. 나와 (전)남편이 능력이 있으니까 비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불편한 기분이 들었고 나중에는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그 친구에게는 자격지심으로 비쳤다. 그때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자격지심이 맞다. 여유가 있어서 좋겠다고 인정해 버렸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예전 기억이 한차례 머릿속을 지나가자 나는 나의 차림을 훑어봤다.    

 

나: 엄마 이상해?
초밥: 어. 왜 등산복 입었어? 중국모자는 뭐야?
나: 너 학교 데려다주고 산에 가려고. 이건 중국모자가 아니고 비니야. 등산복은 목, 손목, 발목 등 몸의 모든 목을 차단시켜 줘서 보온에 효과적이지. 내가 등산복을 일상복으로 활용하는 이유야.

초밥: 늙어 보이는 효과도 있네.
나: 그래? 

초밥: 어. 확실해.   

  

그녀도 등교하기 전에 아이와 병원에 오느라 급하게 나온 것 같았지만, 등산복은 아니었다. (명품 추리링? 뭐 그런 것 같았다) 못 보던 새 내가 노화의 급물살을 탔다고 생각하려나. 가만있어봐, 나를 아예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내가 회상과 자의식을 오가는 사이 그녀는 진료를 마치고 떠났고, 그 자리에 세 살쯤 되는 아이와 엄마가 앉았다.      


아이: 채빠채빠.

엄마: 책 보고 싶었쪄요~ 책 가지고 오세요.

엄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는 복도 끝에 있는 책꽂이로 다다다다 뛰어가더니 동화책 하나를 뽑아왔다.

엄마: 요거 읽어줄까요?


책을 펼치자 아이는 그림을 가리키며 “아빠, 엄마, 아기”라고 했고, 엄마는 “아이고 잘했어요”라고 했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덩달아 “어이고, 잘하네” 맞장구를 쳤다. 아이 엄마가 인사하라는 뜻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하자 아이가 따라 했고, 나도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초밥이가 내 옷을 잡아당기며 입모양으로 ‘하지 마’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추임새를 계속 넣자 이젠 아예 버프를 내 얼굴 위로 끌어올려버렸다.     


나: 봐봐, 너무 귀엽잖아.

초밥: 속으로만 귀여워해.     


조 앙증맞은 아이가 불과 13년 후에 이렇게 무서운 언니로 변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이야, 부디 너는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시간이 흘러도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기를.     




“엄마한테 내가 일 순위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초밥이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이다. 그러면서 내가 예전과 똑같이 지낼 것 같다면서 걱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인정머리 없는 믿음이 나는 마음에 든다. 글을 쓰다가 새로운 소재가 떠오르면 기뻐하고, 글이 안 풀려서 머리를 싸매다가 벌떡 일어나 보미와 산책을 가는 일상.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때는 초밥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녀석도 그렇겠지.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일어나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내 생각은 나지 않겠지. 일 순위가 아니라는 건 다채로운 일속에서 몰두하고 지낸다는 뜻일 테니까.   

   

엄마가 생각나는 날은 혼자라고 느낄 때, 하고 있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아닐까. 가끔 찾아오는 그런 반갑지 않은 날, 불쑥 엄마한테 전화해서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장난을 받아주겠지만, 그런 날은 네가 엄마가 일 순위인 날이겠지. 


괜찮아. 네가 해바라기처럼 나만 바라보던 시절 따뜻하고 충만했으니까. 이제 너는 나보다 5센티미터나 큰 사람이 되어 너만의 일 순위를 만들어가는 길 위에 있으니까. 나는 다른 길에서 나의 일 순위를 만들어가 볼게. 서로 달라져가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자.


글을 쓰다가 카톡을 해봤다.


나: 요새 보미랑 대화하고 있어. 심심해서.

초밥: 엄마는 아직 적응 안 됐어? 아, 나 진짜 엄마 모공만 떠올려도 눈물 났는데 고등학교 로망이 덮어줬어.

나: 주굴래.     


이제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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