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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y 18. 2024

만나니까 좋은데 헤어지니까 더 좋다

나는 튀김어묵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다가 눈이 동그래져서 소리쳤다.    


“뭐? 담임샘이 남자였어?”

“어. 남자야. 내가 말 안 했나?”

초밥이가 튀김만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난 몰랐어. 아, 그렇구나, 그러네. 맞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초밥이가 잘생긴 체육샘한테 달려가서 사진 찍는 걸 보고 담임샘이 서운하다고 했던 일, 교문 앞에서 선생님들이 젤리를 나눠주는데 바로 옆에 있는 담임샘은 알아보지도 못하고 체육샘한테 직진해서 담임샘이 “‘우리 반에 15번이(초밥이 번호) 있었나’ 했던 일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뒤늦게 나는 그게 웃겨서 맞네, 맞게 하고 웃음이 터졌다. 남자샘이어야 앞뒤가 맞는데 나는 왜 여자샘이라고 생각했지? 초밥이네 담임샘과 체육샘은 둘 다 20대 후반의 남자다.     


나: 와, 김말이 미쳤다. 제대로 튀겼는데?

초밥: 나 한 입만.

나는 잡채 안에 떡볶이 국물을 담아서 초밥이 입에 넣어줬다.
초밥: 대박! 김말이 몇 개였어?
김말이는 세 개였는데 내가 두 개를 먹고, 방금 먹은 게 마지막이었다.      

나: 김말이 더 시키자!


말해 뭐 해, 우리는 대동단결하고 김말이, 튀김어묵을 추가주문을 했다.     


떡볶이와 수다에는 분명 과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거다. 포크로 떡을 집을 때마다 이야기가 건져 올려지고, 한 입 먹고 말하고, 한 입 먹고 대답하는 게 절구 찧기를 하는 것처럼 장단이 맞았다. 떡을 씹으며 세상 사소한 얘기를 하다 보면 한없이 명랑해진다.     


나: 떡볶이는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애. 정신과 치료요법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어.

초밥: 내 말이. 우울할 때 떡볶이를 씹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발랄해져.   

  

떡볶이를 먹고 나서 초밥이를 데려다줬다.     


집에 돌아와 보니 침대 위에 잠옷을 고이 접어서 올려둔 게 보였다. 초밥이가 전날 입고 잤던 내 잠옷을 접어둔 것이었다. 생전 안 하는 짓이었다. 그걸 보고는 마음이 휑해서 보미를 데리고 집 앞 천변에 나갔다. 천변에는 벚꽃이 피어있었다. 가로등에 비친 벚꽃이 화사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가까이에도 벚꽃이 피어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벚꽃 사진을 찍어서 초밥이한테 카톡을 보내봤다.    

  

잠시 후, 사진을 확인했는데도 답이 없길래 초밥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 여기도 벚꽃이 있어. 어디에나 벚꽃이 있어. 먼 곳이 아니라도 말이야. 

초밥:...

나: 울어? 왜 울어?

초밥: 엄마랑 있으면 좋은데 헤어져야 하니까.

초밥이가 울먹거렸다. 나도 울컥했지만 꾹 참았다.     

나: 나는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네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싶으면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 만나니까 좋은데 가니까 편하고 더 좋은 거 있지. 하하. 너도 해봐. 만나니까 좋은데 헤어지니까 더 좋다.

초밥: 싫어.

나: 해봐.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져. 만나니까 좋은데 헤어지니까 더 좋다!

나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초밥: 만나니까 좋은데 헤어지니까 더 좋다.

초밥이가 울면서 따라 했다. 바보.     


나: 근데 이상하다. 작년에 네가 불꽃 축제다, 싸이 흠뻑쇼다 하면서 돌아다닐 때는 엄마랑 노는 거 재미없어했잖아. 집에서도 사진 보정해서 인스타에 올려야지, 릴스 찍은 거 편집해야지, 친구들이랑 카톡 해야지, 그러느라 내가 밥 먹으러 가자, 영화 보러 가자, 산책하자고 하면 맨날 거절했잖아. 나랑 노는 건 진짜진짜진짜 할 일 없을 때 무슨 적선하는 듯이 했잖아.  

초밥:...     

나: 너 지금 기분은 엄마 때문 아니다. 정확히 하자. 하고 싶은 걸 못하고 해야 하는 것만 하면 우울해지는데, 네가 지금 우울한가 보다.      


초밥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도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신나게 떠들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아쉽기만 했다. 그러니 초밥이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초밥이 마음이 무거운 건 싫다. 작년에 팔랑팔랑 놀러 다닐 때처럼 가벼웠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를 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쉽게 거절할 수 있었던 건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니까. 조금 떨어져 있을 뿐 언제나 곁에 있는 건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까.


초밥이와 내가 만나면 좋은데 헤어지면 더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천변에 핀 벚꽃처럼 내 가까이에 있는 좋은 것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다. 만나기만 해도 그냥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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