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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Feb 09. 2024

아이 졸업식에서 전남편을 만난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초밥: 졸업식날 엄마 아빠랑 같이 있을 거야?

나: 대충 있으면 되지 꼭 붙어있어야 되냐?

초밥: 둘이 따로 있으면 내가 어디로 가야 되나 싶어서.

나: 아, 그러네. 그런 거 고민하게 해서 미안하다야. 그럼 아빠 근처에 어슬렁 거리고 있을게.   


아... 그 생각까지는 못했다. 졸업식에서 만나는 건 피할 수는 없을 거라 예상했지만, 옆에 나란히 서서 "언제 이만큼 컸는지 세월이 참 빠르네요" "그러게요.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게 엊그제 같은데"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안 해서 어색하고, 할 수 없어서 어색한, 내 인생 최고의 어색한 졸업식을 경험하게 생겼다. 이런 건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재미있을지 몰라도 내 일이 되고 보면 전혀 반갑지 않은 법이다. 디데이가 코 앞에 닥치자 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에 이르렀다.


나: 안 가면 안 되지?

초밥이가 무섭게 째려봤다. 이제 두 번째 대안, 투명인간이 되는 것밖에 없다.


초밥: 할머니도 온데.

나: 뭐? 진짜야?

초밥: 어. 아빠가 그랬어. 같이 온다고.


나의 뜨악한 표정을 보고 초밥이가 마구 웃더니,

초밥: 뻥이야. 아빠만 온데.

나: 재밌냐?

초밥: 어. 상황이 웃기잖아.     


재밌냐? 그래, 마음껏 재미있어해라. 왠지 초밥이가 고소해하는 것 같은 건 나의 자격지심 탓일까.


한편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초밥이한테 미안하기도 했다. 졸업식에서 부모 중 누구와 사진을 찍어야 할지, 끝나고 밥은 누구와 먹으러 갈지 고민하다 보면 왜 이런 데까지 신경 써야 하나 싶을 것 같았다. 졸업식의 주인공은 초밥인데 왜 내 기분만 생각하는 거냐며 나를 호되게 나무란 뒤, 나는 정면돌파를 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졸업식 전날 초밥이 아버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아침에 오시려면 바쁘시겠어요. 시간 되시면 졸업식 끝나고 초밥이와 점심 드시고 가세요.

초밥 아버님: 그렇게 해도 될까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망의 졸업식 날, 나는 학교 강당에 들어서서 초밥이 아버님을 찾아서 옆으로 갔다. 

     

나: 오셨어요.

초밥이 아버님: 네.

끝.     


예상대로였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어색했다. 초밥이가 댄스공연을 해서 사진을 찍는 척하며 왔다 갔다 하느라 그나마 불편한 자기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초밥이 아버님도 마찬가지)


한 시간 남짓의 졸업식이 끝나고 초밥이와 아버님, 초밥이와 나, 얼떨결에 세 명이 함께, 둘둘셋 각각 한 장씩 사진을 찍고 끝이었다. 초밥이는 강당을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사진을 찍었다. 곧 끝나겠지 했는데 안 끝나고, 사람들이 다 돌아가서 강당이 텅 비어가는데도 사진 찍기는 계속되었다. 초밥이 아버님은 차에서 나는 운동장에서 기다리기를 한 시간.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가도 되겠다 싶어서 초밥이한테 아빠랑 밥 먹고 오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졸업식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꽃길만 걷자” “밝은 미래” “꿈을 이루자”였다. 삼십 년 전 나의 졸업식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보낸 시간은 그리 밝지 않았고, 꽃길만 있지 않았고, 대부분 꿈같은 거 생각하지 못했다.


17년 전 이 사람과 내가 이런 모습, 이런 기분으로 서있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몇 년 만에 만나서 간단한 인사조차 하기 힘들고, 옆에 서있는 것조차 버거운 사이가 될 거라고 말이다. 학교 밴드부가 부르는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를 듣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쓸쓸했다.


내가 상상한 미래가 아니고, 전형적으로 모범적인 부모는 되지 못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지금보다 조금 나은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알았다. 초밥이 아버님한테 미리 연락한 덕분에 어색했지만 그래도 견딜만했다. 밝기만 하지 않고, 꽃길만 있지 않아도, 대부분 꿈같은 거 생각하지 못하는 날들이라도 그래도 괜찮다고, 그래도 괜찮은 기분을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말도.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https://youtu.be/BKHMWVicsgE?si=A5zPHdBofcg13PWU


(그날 밤, 초밥이는 세 명 가족 사진에서 표정관리 안 된 내 얼굴을 보고 웃겨 죽을라고 했다. 재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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