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Mar 15. 2024

폭식을 끊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참기 대신 기록

작년 12월에 비인중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강의 제목은 <기록하는 삶>이다. 아침에 연습을 하는데 초밥이가 등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이런 내용 어때? 관심 있을 것 같아?
초밥: 듣는 애들은 듣겠지.

나: 넌 어때?

초밥: 나야 안 듣지.
 

초밥이의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한 사람만 듣는다고 생각하자’며 마음을 비웠다.      


초콜릿과 젤리를 사가지고 가서 강의를 열 때 박수를 많이 친 사람,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그리고 “하나도 안 받은 사람?”이라고 묻고 나눠주었는데, 정확히 그 시점부터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경계의 빛이 살짝 흐려지는 것 같은 기분.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자 몇몇은 잠 오는 얼굴, 지루한 표정을 지어서 나를 작아지게 했지만 말이다.   



  

과외하는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폭식을 끊고 싶은데 잘 안 돼요.”     

“평소처럼 먹고, 먹은 음식을 적어볼래요? 안 먹으려고 참으면 폭식하게 되잖아요. 기록만 해봐요.”     


그리고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돈 씀씀이를 줄이려고 지출할 때마다 적었는데 하다 보니 돈을 쓸 때마다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당장 먹을 것도 아니면서 소면과 당면을 왜 샀지? 주차도 힘든 대형마트는 왜 가는 거지?      


하루는 집 앞 마트에서 파래와 무를 삼천 원에 사서 파래초무침을 만들었는데 입맛이 도는 게 무척 만족스러웠다. 문득 이전에도 이런 소박한 기쁨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화려한 물건과 공격적인 광고에 가려서 금세 잊어버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적은 돈으로 만족스러운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집에 굴러다니는 동전으로 맥도널드에서 900원짜리 커피 마신 일, 세 개에 이천원인 붕어빵을 사 왔는데 딸이 “사랑합니다, 어머니”라고 했던 일 같은 걸 메모했다.      


먹는 걸 참으면 폭식하게 되고, 소비를 참으면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기록’을 하면 이유 없이 했던 행동을 되돌아보고, 되돌아보는 시간이 더해지면서 차차 습관을 바꿔나갈 수 있었다.      


신기한 건 하나의 기록이 다른 기록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나는 지출내역을 쓰다가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었다. 최근에는 노화, 죽음, 행복, 성공 같은 관심키워드를 정하고 일상에서 그와 연관된 일이 있으면 짧은 감상을 남기고 있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성공이 뭔지, 행복이 뭔지 여전히 아는 게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건 큰 주제이긴 하지만, 삶 안에 있는 것인데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나의 무기력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한다. 지금은 관심 주제가 생기면 기록하고 그걸 모아서 글을 쓰고 있다. 성공, 행복, 노화, 죽음은 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반추하는 시간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설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이것이 그날 했던 강의 내용이다. 그리고 마무리는 이렇게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동네에서 똑똑하면 신동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SNS나 유튜브로 전 세계에서 예쁜 사람, 뭘 잘하는 사람을 볼 수 있잖아요. 이런 사회에서 열등감을 가지지 않기란 참 힘든 일 같아요. 매일 하는 기록이 남과 비교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만들어줄지 몰라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자신감을 잃은 초밥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경쟁이라는 길 위에  올라선 아이들 그리고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길 끝에 있는 깃발을 향해 달리는 것과 포기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어서 지난 강의를 반추해 봤다.


강의가 끝나고 책 <돈없이도>에 사인을 해주는데, 한 학생이 “희귀본이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라고 했고, 또 다른 학생은 "작가한테 처음으로 사인받아요"라고 했다. 

    

학교를 나오면서 강의 제안을 해준 지선생님한테 인사를 했다.    

 

“작년에 한산중학교에서의 (망했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또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요.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점점 잘하게 될 거예요.”


우리의 삶은 몇 살이 되던 패자부활전 같은 것이 아닐까. 남편과는 잘 지내지 못했지만 아이와는 잘해보고 싶고 뭐 그런 거.     


(강의 사진을 올리고 싶지만 걸리는 게 많아서) 오늘 먹은 보리비빔밥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