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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은 소신이 없으니까

by 김준정


나림이는 자기 방에서 혼자 자겠다고 선언했다.

"엄마, 이제 내 방에서 혼자 잘게."

"안 그래도 되는데, 엄마 불편할까 봐 그래?"

"아니.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혼자 자도 괜찮아."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는데 따르는 수밖에 없다.


나림이가 태어나고 줄곧 한 방, 한 침대에서 같이 잤는데 혼자 자려니 침대가 운동장 만하게 느껴졌다. 항상 먼저 잠들어 버리는 녀석에게 하는 장난도 이제 끝이다. 대개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입에 넣는 그런 장난인데, 최근에 나림이가 얼굴을 붉히고 정색을 하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예전에는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 먼저 장난을 걸어오던 녀석이었는데. 한바탕 몸으로 뒹굴며 숨이 끊어질 만큼 같이 웃던 그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녀석이 서운하고 낯설다.


딸의 키는 163센티미터. 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감당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은 얼마나 자랐을까? 덜컥 겁이 난다.

오늘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일주일 전에 학부모 상담 신청서에 오늘 날짜와 시간에 체크한 기억이 났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는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어머님, 나림이가 참 예뻐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고요. 아이들은 나림이를 아이돌 보듯이 해요."

"아이돌요?"

"네. 키도 크고 옷도 잘 입는다고 반 아이들이 따라 하려고 해요. 그런데 나림이 옷이 문제예요. 반바지가 너무 짧고 윗옷은 길어서 바지를 안 입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아이가 워낙 성숙해 보이니까 저는 걱정이 돼요. 세상이 무섭잖아요."

"..."

"한 번은 수업 중에 나림이가 떠들었어요. 그런데 목소리가 커서 아이들이 한바탕 웃어버리는 바람에 제가 나림이를 혼낼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얘기를..."

"보통 이런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야한 채소는?'이라고 초밥이 가 짝꿍에서 묻고는 '정답은 버섯'이라고 하면 아이들이 다 웃는 거예요. 문제는 아이들이 나림이의 말과 행동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런 것까지 따라 하려고 한다는 점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야한 채소가 버섯이라니, 순간 내가 버섯이 되고 싶었다. 아이의 변호를 할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사과부터 했다.

"학생들을 통솔해야 하는 선생님 입장을 곤란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그런 상황이 자주 있다면 선생님께서 힘드실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담임 선생님은 학기 초에는 심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이제는 내가 따로 해줄 건 없다고 했다.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그동안 많이 혼났을 아이 생각에 가슴이 딱딱해졌다. 선생님은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를 이해는 하지만 옷차림을 단정해질 수 있도록 엄마인 내가 신경 써 달라고 하셨다.


옷은 본인이 골라서 입도록 하는 게 나의 원칙이다. 나는 나림이가 학생이어서, 여자여서 조심해서 옷을 입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버섯' 얘기 때문에 나의 소신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버섯에게는 소신이 없으니까.


민망하지 않도록 메리야스나 속옷을 잘 챙겨 입히겠다고 했다. 짧은 반바지와 박스 티, 크롭티는 지켰다. 그것을 빼면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


당장 속옷(아이돌 속바지)부터 사러 가야겠다. 다음은 나림이와 대화를 나눠야겠지.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내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잘못했을 때 부모님은 '얘기 좀 하자'며 불러 앉혀서는 일방적인 훈계를 하셨다. 대화를 하자더니 처음부터 내 얘기는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후로는 부모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 거부감부터 생겼다.


나는 딸에게 사랑받고 싶다. 주기만 하는 사랑 말고.

'크로스핏'을 등록했다. 나림이가 원래 먼저 하고 있었는데 나도 하기로 한 거다. 고강도 근력운동으로 우선 땀부터 같이 흘려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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