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를 보는 나는 불안했다
늦잠을 자니까 의욕이 없지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문밖에서 말소리가 소곤소곤 들렸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소리는 계속되었다. 거실에 나가보니 소리의 근원지는초밥이의 방이었다. 방문을 열자 침대에 누운 채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초밥이가 눈에 들어왔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친구들과 중계방송을 해가며 신나게 배틀그라운드에 집중하고 있는 녀석.
총을 열심히 쏘아대는 녀석의 뒤통수에 나는 레이저를 쏘았다. 불시에 기습공격을 당한 적은 흠칫 놀라더니 기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은이랑 규란이랑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휴대폰을 거둔 적의 항복을 받아내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취조를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초밥이가 아침 10시까지 자는 이유를 알았다. ‘휴대폰을 압수해야 되나? 방에서 뭘 하는지 감시를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방학 때는 늦잠을 자도록 내버려 뒀다. 하지만 코로나 19 확산으로 개학이 4월 9일로 연기가 된 상황에서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하나 싶었다. 늦게 일어나니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예전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면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했겠지만,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다. 광활한 인터넷의 바다에 빠질 공산이 크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내가 즐겨 입는 브랜드의 옷을 검색하다가 정상가가 40만 원이 넘는 트렌치코트를 6만 9천 원에 구입했다. 몇 년 이월된 제품이긴 하지만 트렌치 코트라는 게 유행이 없고(내 몸이 변할 뿐이다) 해당 브랜드는 매년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내놓기 때문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문제는 한 번의 득템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반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이라고 감탄하면서 셔츠와 블라우스를 충동구매를 하고, 친구에게 공유를 해주며 사라고 부추겼다. 급기야 아침에 눈뜨자마자 새 제품이 올라왔는지 확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격렬한 검색질은 다른 브랜드까지 이어졌고, 나는 손맛을 잊지 못하고 화투판을 찾는 타짜의 심정이 되고 말았다. 반면 트렌치코트는 택배박스에서 나온 뒤로 내 몸에 30초 정도 걸쳐졌다가 두 달이 넘게 옷장에서 잠자고 있었다.
결국 나의 불안이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딸도 그럴 거라는. 얼마 전에 분희 언니를 만났다. 초밥이 안부를 묻는 언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늦잠을 자니까 애가 주변의 관심도, 의욕도 없어지는 것 같아.”
“의욕이 없다는 건 누구 생각이야?”
언니의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딸이 늦잠 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니 무기력해 보이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데로 보이는 법. 언니의 질문은 아이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그렇게 생각한 자신부터 돌아보라는 뜻이었다.
아이들도 친구들과 늦게까지 혹은 밤새서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어른들도 술자리를 갖는 것처럼. 아이들도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과 놀 수도 있다. 헬스클럽을 끊어놓고 가지 않는 나처럼. 중요한 것은 빈도인데, 목적이 상실될 만큼 잦지 않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반성을 하더라도 아이의 몫이니,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나는 고민해야 했다.
‘내가 술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이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같은 불안 때문에 아이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실수를 하지 않고 제일 빠른 길로 가길 바래서인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지만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잘못하고 후회하고, 또다시 다짐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런 시간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면, 아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경험을 얻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