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게 하는 영화

<만약에 우리>

by 김준정

영화를 보고 나면 ‘만약에 우리’로 시작하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영화는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십 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쳐 지나갈 뻔한 만남이 어떤 사정으로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서로에게 건네는 물음 사이로 둘의 만남부터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간을 거쳐 실망과 포기, 파국으로 이르는 장면이 배치된다.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것 같았다. 흑백의 화면이 애수에 젖은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었다.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는 문상객처럼 둘은 오래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듣고서야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 함께했던 기억을 하나씩 떠나보낸다. 그리고 관객에게 물어온다. 당신은 이별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인연이 있냐고.


나는 ‘만약에 우리’로 시작하는 질문을 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에 빠져들지만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런지 한참 이유를 생각해 본 후에야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답에 이르렀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어서라고. 그러고 보면 젊은 시절에 나는 ‘공주는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할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한편 최근에 남자사람을 봐도 좀처럼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사람에게 바라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며 흡족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바라고 조르고 안되면 화를 냈던 시절이 새삼 그립지 뭔가. 세상 어딘가에는 나에게 뭐든 다 주고 싶어 하는 남자가 한 명쯤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것도 괜찮은데 하면서.



*

초밥이는 로맨스는 간질거려서 보지 않는데, <만약에 우리>를 보자는 나의 제안을 두 번만에 받아들였다. 그 이유를 나는 사막 같은 고3 생활에서 영화관람이란 장르와 상관없이 오아시스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서로 언제 우는지 체크했는데, 훌쩍거리는 소리에 쳐다봤더니 초밥이는 콧물을 닦으며 씩 웃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초밥이가 그랬다.

“엄마 어땠어? 나는 나쁘지는 않았어.”

“영화를 배경에다가 추억을 얹어야 하는데, 너는 뭐가 없잖아. 그러니 재미가 없지.”

“엄마는 왜 울었는데?”


원이 은호와 사귀기 시작할 때 ‘너랑 헤어지면 돌아갈 곳이 없어지잖아’라고 하는 장면과 십 년 후 정원이 ‘한때 나의 집이 되어주어서 고마워’라고 할 때다. 한 시절 나를 위해 뭐든 다해주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 정원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은호의 아버지가 해준 음식이 정원에게는 집밥이었다. 밥을 먹고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정원이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은호와의 이별이 아프지만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지하철을 탔더라면 우리 안 헤어졌을까?”

은호가 우산을 가지고 달려 나가 정원을 찾았을 때 지하철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면 둘은 지금 다른 모습이었을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던 시절. 그걸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만큼 확신에 찼기 때문이 아닐까. 뜨거운 가슴 때문에 계산하고 따져보는 것이 무의미했을 테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심이라고 부를만한 것인지 모른다.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이 애틋하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따져보지 못할 만큼 뜨거웠던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은호가 한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순간이 아마도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할 때였을 거다. 우리도 그랬듯, 오직 진심만 있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영화 속 OST인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은 한때 내 휴대폰 컬러링이었다. 이 노래가 찬송가냐고 물어온 사람이 떠오른다. 도무지 교회와 어울리지 않는 내가 무슨 찬송가냐고 했던 사람. 그에게 안부를 전한다. '영화 봤어?'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이 노래를 들었을 사람(들) 모두 안녕하기를.


밥을 먹는 정원을 바라보는 은호, 이제 나는 이런 장면에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8살 딸과 함께 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