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산우들과 송년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토요일 저녁 5시. 예약한 식당은 횟집이었다. 장소를 정할 때 석산고님이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고, 나는 방어라고 했다. 그러자 인정 많은 산우가 초밥이도 데리고 오란다.
“초밥이한테 시간은 금이에요. 엄마하고 주말에 시간을 보내면 엄청 손해라고 생각할걸요.”
이 말을 초밥이한테 전하자 “뭘 그렇게까지”라고 하더니, 잠시 후 “방어라고?”하고 되물었다.
내가 외출준비를 하는 동안 하루 종일 빈둥거리던 녀석은 내 침대에 대자로 누워 “엄마는 방어 먹는데 나는 뭐 먹어, 엄마는 방어 먹는데 나는 뭐 먹어” 돌림노래를 불렀다. 원하는 거 말하라고 했더니 이러는 거다.
“피자 시켜 먹게 만원만 보태줘. 나머지는 내 돈으로 낼게.”
알겠다고 하자 돌림노래는 딱 멈췄다. 그때 석산고님한테 전화가 왔다. 이미 다들 도착했는데 아직도 집이냐며 “방어 취소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 나가요”하고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피자 얼마야? 27,000원인가? 27,000원 보내줄게.”
“우와! 진짜? 고마워!”
초밥이가 원하는 건 엄마와의 외식도, 영화도, 여행도 아니다. 현명한 엄마라면 거절당할 게 뻔한 그 어떤 일도 제안하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 계획-제안-거절-상처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야 이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초밥이는 하고 싶지 않고, 내가 같이 하자고 하면 초밥이는 혼자 하고 싶어 한다. 기대를 멈추자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었다.
*
문우들과 이탈리아인 셰프가 있는 식당에 갔을 때였다. 재료의 맛을 잘 살린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먹으며 초밥이한테 주말에 오자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계획-제안-거절-상처 공식이 떠올랐다. 대신 다음날 아침밥으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초밥이는 “스파게티네”하더니 오른손으로 면을 떠먹고 왼손으로는 휴대폰으로 버스배차시간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자 안된 마음이 들었다.
"데려다줄게. 천천히 먹어."
"진짜? 고마워."
초밥이는 휴대폰을 끄고 조금 느긋해진 자세로 스파게티를 먹었다.
"아냐. 내가 고마워. 4일 동안 버스 타고 가줘서. 니가 나갈 때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나 몰라."
초밥이는 크크크 웃었다. 우리 사이의 공기가 1도쯤 올라간 것처럼 훈훈해졌다.
나: 어제 문우들이랑 마르게리따 피자랑 토마토 스파게티 먹었는데 맛있더라.
초밥: 거기 이름 뭔데?
나: 라노.
초밥: 아, 거기, 지유 생일 때 가봤어. 괜찮더라.
초밥이는 이렇게나 잘 먹고살고 있었다. 나만 맛있는 거 먹을까봐 미안해할 필요 없었다. 엄마 미안하지 말라고 저렇게 잘 먹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먹성 좋은 엄마는 어디서든 잘 먹고 있을 거라며 안심하는 것 같아서 기쁘기까지 하지 뭔가.
*
다시 방어를 먹은 날로 돌아가자. 산우들과 이른 시간에 만났더니 식사하고 차를 마셨는데도 집에 돌아오니 저녁 8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헬스장에 가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초밥이가 어디 가냐고 묻길래 운동하러 간다고 했다.
“나도 갈래.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더니 몸에 더 힘이 없어”
헬스장에 가서 우리는 나란히 러닝머신에 올랐다. 내가 1분 빨리 달리기, 2분 천천히 걷기를 하자, 초밥이가 흘끗 보더니 따라 했다. 인터벌 러닝 30분이 끝나자 초밥이가 집에 가려고 해서 내가 붙잡았다.
“근육운동 좀 하자. 뭐 할래?”
초밥이가 랫풀다운을 한다며 기구에 앉았다. 기회가 왔다 싶었다.
“내가 가르쳐줄게. 함 봐봐.”
내가 웃통을 까자 초밥이가 기겁을 했다.
“엄마, 여기서 왜 이래. 이러지 마.”
“날갯죽지가 만나는 거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 어때? 보여?”
바를 내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때? 너하고 다르지? 힘 안 들이고 올라오는 것 같지 않냐?”
대답이 없어서 돌아보니 초밥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나 했더니 초밥이는 반대편 벽에 있는 거꾸리에 올라타 있었다. 가자는 말을 온몸으로 하고 있는 초밥이를 데리고 아파트 헬스장을 나왔다.
집안에는 보미가 우리가 ‘분탕질’이라고 부르는 짓을 해놓았다. 자기만 두고 나갔을 때 배설물을 싸놓는 행동인데, 범행 장소로 화가 난 대상을 정확히 알려준다. 나일 때는 안방과 주방, 초밥이일 때는 초밥이 방이다. 외출시간이 길어지면 재활용 쓰레기 모아둔 것을 다 헤집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데, 그 참혹한 현장을 마주하면 조그만 몸 안에 무슨 화가 이렇게 차 있는지 무서울 정도다. 연대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우리는 보미를 데리고 산책을 시켜주었다.
보미를 씻기고 나도 화장을 지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책을 한 권 들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자 문득 행복감이 밀려왔다. 큰소리로 말했다.
“너랑 같이 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하니까 너무 좋아. 행복해.”
이번에는 초밥이도 “나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