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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24. 2020

숙박 없이 하는 수학여행

몰랐다. 전교회장과 엄마는 세트라는 걸.

“저한테는 선택권이 없는 거겠죠…저 아이는 어쩌자고 선거에 나간 건지, 아니, 제가 무슨 말을, 아니에요. …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데…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으니… 제가 어디로 가면 되죠?”

“하하하, 어머님 재미있으시네요. 그리고 말씀드리는 김에 한 가지 더 부탁을…”

“네 선생님 뭐든지 부담 갖지 말고 시켜주세요. 봉사의 달인(선거구호) 엄마니까요. 하하하.”

나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수화기로 퍼졌고,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 반이 학기 초에 녹색어머니 신청을 다섯 분이 해주셨어요. 어머님도 해주셨고요. 할당된 기간이 4일이라 여섯 명이면 세 명씩 이틀씩 하면 되는데…다섯 분이라… 한 분은 4일을 서야 해서 말이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또 교통봉사 체질이잖아요, 하하하”


화기애애하게 선생님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초밥이를 째려봤다. 내가 통화하는 걸 옆에서 쿡쿡거리며 듣던 녀석이 말했다.

“선생님한테 왜 그렇게 농담을 해?”


그렇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총각 선생님이다. 초밥이가 5학년 때 가입했던 스포츠 클럽 담당 선생님이어서 초밥이 말로는 자기와 친하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적극적이고 인간적인 분 같았다. 초밥이는 코로나 19 여파로 6월부터 학교를 갔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높임말을 사용하고,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들이 버릇없게 구는 일에도 감정적으로 응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분이었다.


선생님 말에“이 씨”라고 한 아이에게선생님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뭐라고 했어요?”라고 했고, 아이는 “아니예요”라고했다고 했다. 초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식의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만은 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선생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권위적이거나 무관심했던 이전의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학기초, 학교는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선생님은 매일 문자를 보내왔다. 형식적이지 않은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상담기간이 되었네요. 학생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 맞춤복 같은 방법은 어려울 수 있지만 학습방법이든 뭐든 상담 가능하십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많이 많이 신청해주세요~ㅎㅎㅎ”


전화로 만난 선생님도 다르지 않았다. 웃음이 많고 밝은 분위기를 가진 선생님. 가르치려는 태도보다는 내 얘기를 귀담아들으려고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담 시간은 15분이기 때문에 나는 3분쯤 남았을 때 선생님의 인사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뭔가를 자꾸 질문했고, 웃었고, 말했다. 예전에 담임 선생님들은 뭔가에 쫓기는 듯했고 사무적으로 느껴졌는데. 낯설었다. 그런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도와드려야지. 절대 총각 선생님이어서가 아니다.


며칠 뒤 초밥이와 나는 나란히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주제는 수학여행, 나의 주제는 담임 선생님. 어떻게 생긴 분일까? 초밥이 말로는 선생님 별명이 '멸치'라고 했지만 초등학생들의 눈을 신뢰할 수는 없는 법. 별명에 걸맞는 캐릭터가 연상되었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여중, 여고의 총각선생님의 환상을 내가 아직도 갖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 땅의 학교들을 모두 남여공학으로 바꾸어야 한다. 주책맞은 학부모를 양산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회의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파마머리, 뿔테안경, 빨간 티셔츠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초밥이 어머님이죠?"

담임 선생님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점잖은 학부모 역할에 최대한 충실했다. (선생님은 밝고 활기가 느껴지는 분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학부모님 의견은 어떤지 말씀해주시죠.”

담임선생님의 물음에 내가 말했다.

“숙박 없이 현장체험학습을 이 삼일 하면 어떨까요? 확진자가 적은 군산지역으로 제한하면 지역 내 소비도 이루어지고 좋지 않을까요?”

교감 선생님이 말했다.

“숙박을 하지 않으면 예산이 넉넉하니 한 반에 두 대씩 버스를 임대하는 것도 가능하고, 좌석 간격도 넓혀서 앉을 수 있겠네요.”


취소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던 분위기에 반전이 생겼다. 교무 부장 선생님도 좋은 의견이라고 했고, 다른 선생님들 입에서도 긍정적인 얘기가 나왔다.‘장기자랑은 모니터 시청을 통해서 하자’ 같은 아이디어도 나왔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힘들겠지만, 고민한다면 수학여행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취소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여행사를 포함한 지역 내 소비 감소로 어려운 시민이 많기 때문이다. 군산은 바다와 산을 다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군산 구불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수혜를 이만큼 받은 지역도 드물다고 생각했다.


성과가 있었던 회의였다. 총각 선생님을 만나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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