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글로 쓰는 아우성
흥미롭고
즐거웠다
교정교열과 다른 새로운 영역의 문장 공부를 해 보는 중이다.
문장 구성력, 호응, 어휘의 선택, 문단 구성.. 논리적인 틀에서 벗어나
그저 문장을 그대로 느껴보는 시간을 하루에 한 번씩 갖는 중이다.
첫 책은 바로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였다.
글이 업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재미있다. 마지막장을 넘길 때는 아쉬움마저 남았다.
나의 경험과 뒤엉켜 더 인상이 남는 책이 되었다.
첫 책 선택을 아주 잘했다.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편
글과 나 사이에 차가운 강이 흐른다. 글로 가기 위해서는 그 차가운 강을 맨몸으로 건너야 한다. 그 강을 자꾸 건너는 사람들은 현실이 그 강만큼 추운 사람들이거나 고통 자체를 즐기는 특이 체질일 것이다. 예전에 그 강을 자주 건너갔던 것은 그때는 현실이 강만큼 추워서였다. 혹은 그 추위를 견뎌서라도 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문장]
글이 써지지 않는다. 간절함이 덜해서일까? 더해서일까? 일단 써 봐야 안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나를 꺼낸다. 아니 토해 낸다. 사진 100장을 찍으면 1장은 건지는 게 있을 거라는 한결같은 희망을 품고 토해낸 글을 뒤진다. 거지 같은 사진 100장 중에는 그래도 덜 거지 같은 1장이 나오듯 내 거지 같은 글에서도 그나마 덜 거지 같은 하나의 글이 나오기를 바라며. 쓴다. 목적을 향해 가는 글은 그래서 외롭다. 버려지는 99개의 글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냉정하게. 그렇게 100개를 비우면 신선한 피가 돌 듯 내 생에도 생기가 찾아오길 바라며 쓴다. 그래서 쓴다.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이석원 편
그러니까 나는 또 한 번 내가 사랑했던 일을 밥벌이로 삼은 죄로 그 일을 영원히 잃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걸.
[나문장]
도서관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자판기 커피를 찾던 시절. 독하게도 날카로운 칼날로 나를 협박하며 책장을 넘긴다. 노량진 일타강사의 정신 차리라는 말에 섞인 욕설이 귀에 꽂혀 컴퓨터를 덮어 버린다. 커피 한잔 해야겠다. 자판기를 찾는다. 나란 존재. 나란 가치가 참 하찮게 느껴지던 시절. 나를 원망하다 자판기 커피에 내 삶을 의지한다. 한 입에 심장 소리가 들린다. 살아있다. 또 한 입에 손이 떨린다. 잠이 깼다. 그렇게 다시 칸칸이 감옥 같은 도서관에 들어간다.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이다혜 편
쓰고 싶은 기분? 그런 게 뭐야? 원고를 쓰다가 문득 고독해지면 지금까지 작업한 원고량을 원고료로 환산해 본다. 아, 이제 5만 원어치 썼군. 오늘 10만 원어치는 써야 하지 않을까?
[나문장]
교열사가 된 이유는 단순했다. 젖먹이를 키우는 내가 당시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였다. 돈벌이는 내 정체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해야 했다. 아기를 재우면 먼지와 옷으로 빼곡한 창고 같은 쪽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글을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더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지만 한 장 한 장이 다 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쪽방에 있는 그 시간이 그나마 덜 외로웠다. 심지어 교열비가 입금되면 나 자신이 그렇게나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이랑 편
언제부턴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내 글 최고의 독자를 나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릴 적부터 구원 콤플렉스가 너무 심했던 나로서는 아주 큰 결정이었다. 가족, 친구, 연인, 팬들 모두 나를 영원히 지켜봐 줄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나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나문장]
타인의 잣대에 맞춰진 거울은 늘 부족한 나를 비췄다. 순진함은 어리석음으로 비치고 어리석음은 무지함이 됐으며, 무지함은 구석으로 아이를 몰아세웠다. 거울을 깰 줄 모르는 아이는 거울 대신 저를 깨뜨리고 또 깨뜨렸다. 그렇게 깨진 조각은 아이를 찌르고 또 찌르기 일쑤였다. ‘거울을 깨야지 이 바보야. 너 말고.’ 거울 속 아이가 기다림에 지친 듯 말한다. 그제야 아이는 거울 속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살아가는 일에, 아니 살아내는 일 한가운데에서 종종 그렇게 나를 놓칠 때가 있다. 누군가 만든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면 어디서도 자유롭지 못한 내가 서 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속삭인다. 거울을 깨라고. 나는 언제나 내 편이라고.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박정민 편
그렇게나 쓰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메모장에는 쓰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건 봉인의 한 과정이다. 속 썩이는 온갖 것들을 적은 후 금고 안에 넣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그 감정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봉인된 것이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것들을 무쇠 안에 구겨 넣음으로써 내일은 좀 더 산뜻해질 것이다. 산뜻해지기 위해서는 쓸 수밖에 없다. 모순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문장]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관련 주제의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면서 하루를 소비하곤 했다. 그런데도 마음처럼 되지 않아 수납상자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에 있는 내용이 잘 보이는 투명 상자를 샀다. 그런데 이 물건 저 물건이 뒤엉켜 있는 꼴이 다 보이는 수납상자는 더욱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불투명한 상자를 다시 알아본다. 대신 예쁜 무늬가 들어 있거나 깔끔한 디자인을 택했다. 그 안은 어떻든 어디에 있어도 보기 좋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봉인된 물건들은 한참이 지나도 찾아지지 않으면 큰 결심을 한 날 쓰레기통으로 갔다. 그리고 집은 깨끗해졌다. 마음도 후련해졌다. 오늘은 집에 가는 대로 냉동실에 봉인해 놓은 음식물 쓰레기를 모조리 비워야지. 벌써부터 후련하다. 내 마음의 쓰레기도 비우고 싶다. 모조리.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박정민 편
나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태양이 가려진 구름 밑에 있었다. 대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아이스크림 궁전을 만들었다. 내가 노스탤지어에 빠지는 순간은 대부분 그 아이스크림 궁전을 떠올릴 때다.
[나문장]
내 발목에 묶인 풍선을 느낄 때가 있다. 상상이 상상을 물고 그 상상이 또 다른 상상을 만들어 온몸이 붕 뜰 때면 풍선의 개수가 얼마나 될까 또 상상하곤 했다. 그런 환상 속에서 사는 걸 즐겼던 것도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른이라는 타이틀이 생기면서는 떠 있던 나를 끌어내리는 무게감으로 발목에 묶인 풍선을 느꼈다.
나이가 들면서 정의 내려진 지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멍청한 상상력을 흐릿하게 하기에는 흑백논리만큼 강력한 마취주사도 없다. 가령 이런 거다. 저명하고 권위가 있는 박사님이 나와서 통계에 따르면~ 이론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논리의 시작. 그래서 이게 맞습니다! 그건 틀립니다! 하는 단호한 언변에 끌린다. 보일 듯한 선명한 이론에 감탄사마저 나온다. 정답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현실적인 말을 들으면 내가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래서 쉽게 지치는 건지도 모르지만.
내 아이스크림 궁전은 그래서 오히려 잘 지켜지고 있는 듯도 하다.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백세희 편
창작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하잖아요. 물이 끓어서 기체가 되는 것처럼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창작물은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요. 중요한 건 계속 끓고 있다는 거죠.
[나문장]
뇌의 일부를 한 자리 차지한 책 쓰기 과정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머리에서 떠나가지를 않는다. 보통 글을 쓰면 후련했는데 책을 쓰는 일은 거리가 매우 먼 모양이다. 힘들게 넘은 산 앞에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높은 산을 보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삶의 균형을 찾기 시작한다. 이러다 몸 다 망가지겠네. 운동 좀 해야지. 사람도 만나야지 당장 급한 일도 아닌데. 일이 먼저지 책이 먼저야? 애들이 어린데 어떻게 내내 이기적으로 산담. 오늘은 가족을 위해 보내자. 새벽에는 몽롱해서 글이 글 같지 않아. 비겁한 변명을 높은 산 앞에 더 높게 세운다. 그러다 보면 책 쓰기는 저~ 끝에 가 있다. 눈 가리고 아웅. 내내 편하지가 않다. 할당량을 채우지 않았다는 끈적한 생각이 머리를 괴롭힌다. 두통이 늘었다.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한은형 편
나는 이 모든 병의 근원을 안다. 내가 쓰지 않아서. 쓴 것을 끝내지 않아서.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원인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았지만 끝낼 수 없었다.
[나문장]
이상하다. 하품을 하는데 입에서 알코올향이 느껴진다. 양치를 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다. 입을 덜 헹군 건가. 치약에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나? 오래간만에 느낀 알코올향이 반갑다. 갑자기 씁쓸한 와인이든 이름도 알지 못하는 보드카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한 잔 마시면 글이 더 잘 써질까?
[원문장]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임대형 편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천재적인 영감보다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의외로 당연하지 않다. 작가에게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없는 근육을 만들어 유지하는 일과 같다.
[나문장]
1분 플랭크를 시작했다. 1분이라면 꾸준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3 때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이런 허리는 또 처음이라며 의사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게 뇌에 꽂혀 있다. “허리에 근육이 없어. 그냥 두부야.” 글을 보며 살아야 하는 직업이라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글에 근육이 없어. 그냥 두부야.’ 근육이 없으면 꾸준히 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두부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바로 운동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당시 내 마음이 그랬다. 수능이 끝나고 운동을 시작해 보려고 했을 때는 뭘 해야 할지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였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체육관을 택했다. 덕분에 3년 동안 합기도를 배웠다. 글도 같았다. 혼자 써 보려니 글은 늘 감성이 충만하거나 분노가 가득한 날만 기록이 되어 있었다. 충동적이고 우울했다. ‘내가 글을 쓰면 돈이 안 되는데 남의 글을 봐주면 돈이 되잖아!’ 이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내가 휘갈긴 글들을 모두 휴지통에 넣어 버렸다. 하지만 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다. 글을 다시 쓰는 중이다. 흰 띠를 매고 매일 조금씩 근육을 키운다. 그래서 내 글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뭐. 흰 띠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낫다. 언젠가는 이 일상 안에서 근육이 붙겠지. 붙어버려라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