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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플리트 Jul 27. 2022

도라지 위스키 한 잔

요즘 악기 가방을 메고 거리에 오가는 아이들을 보면 바이올린, 플룻, 우쿨렐레 등 다양한 악기를 익히는 듯하다. 우리 때는 저 악기들이 중산층의 악기였는데, 지금 아이들에겐 보편적인가 보다. 얼마 전 결혼식에 갔다가 신랑이 신부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는 걸 봤다. 바이올린 켜는 남자가 흔한 세대는 아니었기에 그 결혼식의 축가 타임은 특별했다. 현란한 비브라토, 연주하는 자 특유의 몸짓이 ‘우리 집, 좀 살았다.’는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집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아이를 보다가 난 아니지만 내 아이는 중산층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프랑스 중산층에 대한 정의에서 악기 연주를 본 것 같아 검색해봤다.


프랑스에서는 다음 조건이 만족되어야 중산층이라고 한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구사할 줄 알며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1개 이상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함

사회적 공분에 의연히 참여

약자를 도우며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


와, 우리나라 현실과 너무 다르다. 외국어와 스포츠와 악기를 다루려면 대체 몇 살 때부터 투자해야 하는 거지? 시간도 돈도. 프랑스에서는 공교육 자체적으로 1~3번을 지원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저절로 된다고 한다. 그리고 따닥따닥 붙어있는 유럽 환경 덕에 외국어 구사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러니 너무 자괴감이 들 일은 아니다. 생각난 김에 중산층을 더 검색해보니 프랑스, 영국, 미국, 한국의 중산층 기준을 정리한 글들이 꽤 많았다. 


미국 공립학교가 제시한 ‘미국 중산층’

자신의 주장이 떳떳할 것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보는 비평지가 높여있는 사람


옥스퍼드 대학이 제시한 ‘영국 중산층’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할 것

신념을 가질 것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하게 대처할 것 등의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


조르주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이 제시한 ‘프랑스 중산층’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해 폭넓은 세계의 경험을 갖출 것

한 가지 분야 이상의 스포츠나 악기를 다룰 것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 접대를 할 줄 알 것

사회 봉사 단체에 참여할 것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우리나라 중산층 기준(직장인 대상 설문조사)

30평 이상 아파트를 부채 없이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cc 이상 자동차 소유

현금 2억 원 이상 보유

1년에 한 차례 이상의 해외여행


중산층을 정의한 주체가 다르긴 하지만 한국인이 ‘중산층’을 떠올릴 때 경제력 중심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씁쓸하다. 우리들의 삶이 왜 이리 피폐한지 알 것 같다. 교류하며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기보다 집 평수를 넓혀야 하니 버겁다. 악기를 연주할 시간이 없는 게 대학 가기 위해, 취업하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와 약자를 살피기에는 내 코가 석 자다. 어쩐지 내 삶에 낭만이 사라지는 것 같더라니 한국에서는 주위를 살필 겨를 없이 나와 내 가정이 먹고살기 바빠서였다.


낭만. 낭만이라는 단어를 타이핑하는데 벌써 심장이 간질간질하다. 낭만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학창 시절엔 쉬는 시간마다 와다다 5층 계단을 뛰어내려 가 매점에서 그렇게 사다 먹었다. 밤 10시까지 야자타임(야간자율학습)이라 아침 8시에서 밤 10시까지 학교에만 머물렀는데 참으로 많은 역사를 만들었다. 그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할 얘기가 끝도 없이 나온다. 마무리는 늘 같다. “학창 시절 우정이 순도 100% 로인 진짜 우정이야.”


대학 시절은 또 어떠한가. 그야말로 절정의 때가 아니던가. 을왕리 해수욕장의 쏟아지던 별빛들, 진실게임을 빙자하여 탐색해보는 들뜬 마음들, 도서실의 종이 냄새, 캠퍼스의 풀 냄새, 신나서 취하고 슬퍼서 취하고 사랑해서 취하고 사랑을 잃어 취하던 많은 밤들. 거리마다 생기를 흩뿌리고 다녔을 우리들의 젊은 날. 싸이월드에 박제된 풋풋한 내 얼굴이 어느 날은 들뜨게, 어느 날은 서럽게 만든다. 그땐 몰랐던 내 젊음, 내 낭만. 


드디어 회사에 취직한 후 입사동기나 또래 직원들과 친해지면서 모종의 동맹이 생긴다. 생일이어서 만나고 휴가여서 같이 떠나고, 그저 덥다는 이유로 퇴근 후 맥주 한 잔 하고.. 서로 다른 회사로 흩어져도 명분을 만들어 다시 만난다. 그렇게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고 부장이 되어도 모처럼 만나면 박대리, 서대리, 김주임이라 부르며 추억에 젖는다. 


돌아보니 때마다 낭만이 있었다. 성취감은 분명 일에서 오는데, 시간이 흘러 추억할 땐 일 생각은 1도 안 난다. 그때 함께 한 사람들, 그때 함께 한 점심 메뉴, 그때 함께 한 회식의 짤막한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역시 낭만은 돈이나 일에서 나오는 게 아녔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국어사전에 정의된 낭만은 감흥이 덜하다. 차라리 ‘낭만 고양이’란 곡의 가사 한 자락이 더 와닿는다.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두 번 다신 생선가게를 털지 않아.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를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더는 이 도시에서 생선을 훔쳐 먹지 않으리, 바다에서 내 힘으로 물고기를 건져 먹으리란 고양이의 낭만 어린 선언이 감정이입을 부른다. 내친김에 제목만 들어본 ‘낭만에 대하여’를 검색해봤다.

1995년 곡이다. 이 노래를 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낭만, 하면 이 제목이 떠오른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다방, 도라지 위스키, 색소폰, 마담, 뱃고동 소리… 너무나 옛스런 단어들의 향연에 아찔하지만 그 감성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도라지 위스키가 너무 궁금해 검색해보니 도라지가 들어간 위스키가 아니라 일본산 ‘도리스 위스키’라고 한다. 어우, 나름 고급진 곳에서 청승 떠는 한 사내의 모습이 연상된다. 


중산층에서 도라지 위스키로 흘러오다니. 이번엔 변명의 여지없이 삼천포로 빠졌음을 인정한다. 억지스럽게 연결시키자면 대한민국이 정의한 중산층에는 낭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30평 이상 아파트, 월 급여 500만 원, 2,000cc 이상 자동차, 현금 2억 원 이상 보유, 1년에 한 차례 이상의 해외여행을 다녀봐야 뻥 뚫려 허한 가슴을 도라지 위스키로 달래는 처지가 된다. 과거를 돌아보며 낭만을 말한다 하지만, 내실을 채우지 못해 뚫려버린 가슴은 어찌 달래야 하는가. 값비싼 도라지 위스키로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주말에 악기도 좀 배우고, 내 집에 사람을 초대해 서툴지언정 요리도 좀 내어주고, 내 주장이 떳떳하도록 내실도 다지며, 우리 사회의 약자를 보듬고 강자에 대항할 줄 아는 배짱도 키워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정의한 멋스러운 중산층처럼 우리도 그리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홀로 도라지 위스키를 홀짝거릴 게 아니라 인생을 함께 다져온 친구들과 안주 하나씩 들고 모여 농담도 나누며 합주도 해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옆의 동료를 보라. 그냥 우연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인생에 허락된 인연 중 하나다. 훗날 이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이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추억하고 싶은지 떠올려보자. 허투루 보내기엔 아까운 사람이자 시간이다. 지금 이 사람과 이 시간이 미래에 추억할 낭만이다. 돈 벌러 온 회사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진득한 협업, 까칠한 논쟁, 술 한 잔으로 풀어보는 오해와 갈등, 끌어주고 밀어주는 우정 등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직장 생활을 낭만으로 채워보자. 

(무엇보다 썸, 설렘, 사랑.. 이런 거면 너무 좋을 텐데. 나이가 들어도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설렌다. 주책이라 해도 할 수 없다. 시니컬한 이부장, 이미 가장을 꾸린 김이사도 부하직원의 사내 연애 앞에선 무장해제되지 않는가. 사랑은 너무 강력하다. 필자가 대리였던 시절에 너무나 맺어주고 싶던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있었다. 도무지 진척이 없던 그들이 필자의 결혼식에 축가를 부르러 나왔는데, 2절 도입부가 시작되자 두 사람이 슬쩍 손을 잡는 게 아닌가? 필자의 결혼식에서 서프라이즈 하려고 공개를 미뤘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동맹의 깨지지 않는 핫이슈다. 만날 때마다 안주거리다.)


오늘은 직장인의 낭만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 유플리터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면 해서, 회사가 단지 건물이나 공간의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대상이 되었으면 해서 낭만을 얘기해보았다.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출근길부터 퇴근길까지의 모든 순간에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콕콕 박혀 훗날 추억할 게 많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낭만회사 유플리트가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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