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타운홀미팅에서 2020년 공표했던 ‘플레잉 코치 리더십’이 다시 소개되었다.
플레잉 코치 리더십이란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분위기’에서 ‘실패를 용인’하고 ‘반복과 배움’을 통해 ‘일과 성장을 통합’시킬 줄 아는 리더십이다.
'실패를 용인하다.'
며칠 째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필자에겐 묶인 매듭 하나가 툭 풀리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먼저 실패를 용인하자고 할 수도 있구나!
그렇지, 회사도 사람이 모인 곳이지!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회사는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인데, 생명이 없는 무기질의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회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그 안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정, 일에 대한 나의 열정,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딱딱한 회색 건물과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시스템 등이 머릿속에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러니 그 안의 나는 맞물린 톱니바퀴 중 하나처럼 기능하며 내가 실수하면 전체 톱니바퀴가 어긋날 것처럼 조마조마한지 모르겠다.
이제 회사, 조직을 떠올릴 때 회색 건물이나 톱니바퀴 그런 거 말고 다른 걸 상상해야겠다.
내가 실수해도 잠깐 멈췄다가 재가동되는, 옆 동료가 실패해도 수습이 되고도 남는 그런 이미지를 찾아야겠다.
실수와 실패가 성취에 있어 걸림돌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당연히 수반되거나 거쳐가는 요소가 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가 식빵에 침투한 곰팡이가 아니라 식빵을 만들기 위한 이스트가 되도록 인식을 달리해야겠다.
그렇게 조금은 가벼워져야겠다.
돌아보면 인생을 사는 동안 마음에 지진을 일으킨 두어 개의 말이 있다.
그중 하나는 “가벼워지자.”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무단결근이 이어지고, 업무 시간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으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다 망가뜨리는 것 같던 시절에 윈디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정신 차리라고 혼나도 모자랄 판에 ‘가벼워지자’는 윈디님의 한 마디가 (스스로 묶은) 발 한쪽의 족쇄를 풀었다.
번아웃이 온지도 모른 채,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 나머지 땅 파고 들어가고 시야가 좁아지고 음울해졌나 보다.
그래서 가벼워지라는 처방을 내리셨나 보다.
마음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뭔가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이 말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매사 쓸데없이 진지해지는 기질이란 걸 깨달았던 것이다.
‘가볍게, 경쾌하게.’
가끔 주문 외우듯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미생이라는 만화책을 보다가 이 장면이 딱 와닿은 건 나만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실패를 용인하자는 말에서 우리는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 안된 결과가 실패다.
되게 하려 했으나 안 됐을 때가 실패다.
‘어차피 실패할 텐데.’라는 마음을 용인하잔 뜻이 아니다.
‘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 그냥 하는 거지.”를 용인하잔 뜻이 아니다.
실패를 용인하자는 문장은 사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결국’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니 너무 실패한 사실에 연연하지 말고 털고 일어나 다시 되도록 애써보자”의 줄임말이다.
우리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일을 대하는지 얼추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 생각과 마음도 상대에게 읽힌다.
그냥 일을 하는지, 진심으로 하는지 결국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실패가 용인될만한지 아닌지, 나 자신이 알고 상대도 안다.
그러니 ‘실패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으니 대충 하자.’가 아니라 ‘실패할 수도 있지만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라야 용인이 되겠다.
실패를 용인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꼬맹이들이 축구하는 걸 보면 쟤 때문에 졌다고 대성통곡을 한다.
골을 못 막은 골키퍼 때문에, 공을 골문 앞까지 던져줬는데 못 넣은 애 때문에, 바로 앞의 공도 걷어내지 못해 골을 허락한 애 때문에 졌다고 서로 따지고 상처 주고 운다.
하지만 프로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안팎으로 욕먹는 동료를 등 두드려주며 위로하고 응원한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이기고 싶어 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동료의 아픔이 내 아픔이다.
어찌 보면 실패를 용인하는 마음은 내가 뼈저리게 실패해보지 않으면 갖기 힘든 마음일지도 모른다.
내가 실패했을 때 리더가 상황을 잘 마무리하고 내 마음까지 헤아려준 경험이 있는 자는 본인이 리더가 됐을 때 동료나 부하직원의 실패를 지혜롭게 용인해줄 수 있다.
승승장구만 했던 사람이라면, 나는 잘하지만 상대가 제대로 못해서 열 뻗치는 사람이라면, 완벽하게 상황을 컨트롤해야만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면 상대의 실패에 직면하기 힘들다.
‘왜 안될까’가 아니라 “왜 못해!” 가 되는 거다.
문제가 생겼을 때 침착하고 지혜롭게 대처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성품의 영역 플러스 지능의 영역이다.
타인의 실패를 내가 책임진다는 것도 성품의 영역 플러스 감성지능의 영역이다.
즉, 실력과 능력이 필요한 범주라는 뜻이다.
실패를 용인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할지라도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능력이 따라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 얘기하는 건 위로의 영역이 아니라 리더십의 영역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필자에게는 문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없으며 적절한 답을 몰라 얼마나 우왕좌왕했는지 모른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인지 나 자신이 얼마나 쪼잔한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살면서 느낀 바,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의 실력이자 리더십이다.
아니. 같이 일하다가 의견이 안 맞고 문제가 생기면 얘기해서 풀고 해결을 해야죠. 매사에 잘잘못 가려서 상주고 벌주고 난 그렇게 일 안 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에서 정명석 팀장과 권모술수 변호사가 나눈 대화다.
상과 벌로 가르던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상과 벌에 대한 회사와 구성원 간의 관점도 서로 달라지고 있다.
유플리트에서 실패를 용인하자 얘기하는 것도 결국 잘잘못을 가릴 게 아니라 서로 얘기해가며 ‘일이 되게 하자.’가 아니던가.
자고로 고수이자 대인배는 사사로이 동요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을 넓게 보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라야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
시시비비를 잘 가리는 게 똑똑해 보이지만 그것만 잣대로 삼게 되면 타인을 적으로 만들 뿐이다.
시시비비를 분별할 줄 알되, 부족한 점을 품을 줄 아는 리더가 되어 나의 성장, 좋은 동료, 일의 즐거움을 성취하고, 너의 성장, 너의 즐거움도 길어 올려주는 마중물이 되어 주자.
말로는 참 쉽다.
필자에게도 실패를 용인하는 건 취약점이다.
특히나 스스로에게 가혹하다.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플리더 모두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누군가로부터 “그때 제 실수를 품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란 인사말을 들어보는 직장생활이 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