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슨 의미일까
아무래도 네가 없는 게 더 좋긴 한가봐
그러게, 쓸모 없이 왜 물었을까. 당연히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구태여 물어 확인을 받는다. 기분이 우울한 중도, 예민한 중도 아니었던 나는 삽시간에 땅끝 절벽으로 밀려난다. 내가 날이 서서 예민해지는 순간이다. 왜냐면 난 떨어지는 걸 싫어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를 싫어하지 못한다. 이 또한 이유는 같다. 왜냐면 난 떨어지는 걸 싫어하니까. 미움을 받거나 또는 그 미움조차 받지 못하는 먼 발치의 내 모습은 버려진 택배박스처럼 휑하다. 거칠게 뜯다 남은 테이프가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모양새가 괜히 눈길을 끈다. 날리며 부스럭대는 소리가 시끄럽다.
나 때문에 불편하셨나?
소름돋게도 어떤 대답이 나올 지, 그리고 내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뻔히 알면서도 물어본 질문이다. 굳이 마음이 시끄러울 걸 알면서도 물은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와중에 난 언제나 말도 안되는 일말의 쓸데없는 희망을 품는 탓이다. 언젠가부터 사사로이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작은 돌부리를 지나치지 못하고 발끝에 채이면 거기 한없이 서서 짜증 한번 못내고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는 게 내 일상이 됐다. 처음엔 작은 돌부리 정도에만 멈춰섰는데 이제는 작은 모래 하나 지나치지 못하게 된 기분이다. 까끌하고 지금지금한 모든 것들을 밟고 지나갈 용기가 없어진걸까. 이런 수순으로 나는 필요 이상으로 여려진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이 말에 기분이 나쁜 건 네가 옹졸한 탓이야.
아무도 너처럼 생각하지 않을거야.
너는 왜 그런 말조차 그냥 넘기지 못하는거야?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을 하면 아무도 나와 말하기 싫을거야.
모두가 나와 이야기할 때 솔직해질 수 없을거야.
솔직한 것과 상처받지 않는 것, 난 무엇을 택해야 하는거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멀어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내가 덜 사랑하는 나를 상처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상처입을수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이해할 수 없게 될 수록 나를 상처입혔고 그럴 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내 마음은 점점 더 빈약해져갔다.
상처는 아프지? 당연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면 좋겠어? 아니.
그럼 상처를 주면 안되겠지? 응.
그래, 네 선에서 끝내는 게 낫겠다. 알겠어.
기왕 그러는거 마음 불편하게 티내지 말자. 그래.
이렇게 몇년 동안 나의 우울은 의도치 않은 비밀이 되었다. 우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맞다. 전혀 그렇지 않은 척 하기. 몇년동안 내가 상위권을 기록하는 부문이다. 그러는 한편 내심 아무도 내 우울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꽤 섭섭해지는 걸 보니 아주 나 스스로에게 넌덜머리가 난다.
그게 뭐 대수라고.
너보다 더한 사람 많아.
그렇게 사사건건 그러면 어떻게 살아.
그런 사람하곤 못살지. 친구 못하지.
나에게 내가 되뇌이는 말이다. 이렇게 나는 또한번 나를 깎아내린다. 언제나 귀결되는 자기 혐오가, 무엇을 하든 하루의 끝맺음이 자기 비하라는 게 참 고통스럽지만 난 브레이크가 고장난 에잇톤 트럭인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핸들을 잘 조절하고 있지만 브레이크가 고쳐지지 않는 한 어딘가에 쳐박히겠지. 가끔은 내가 고장난 트럭인 채로 폭주하는 스릴을 즐기나. 스스로를 가여워하며 만족감을 느끼나. 난 과연 브레이크를 고치고 싶어하나. 라는 깊은 생각을 한다. 결국 그러다 하나의 묵직하고도 간결한 질문에 다다른다.
왜 살지?
끊임없이 이거에 대해 고민하다 천주교인인 나는 불교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곳의 스님은 그러더라. "그냥 태어났으니 살지. 왜 살지를 계속 생각하면 그 끝은 뻔하다. 죽음이다. 생각하지 말라. 이유가 없다. 우린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났으니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연가시에 감염돼 빵빵하게 배가 차오른 사마귀가 떠올랐다. 틀림없었다. 우울은 연가시인 게 틀림없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살지를 고민하다 눈물을 펑펑 쏟아낸 날이면 그대로 잠겨 죽음을 생각했다. 연가시는 물가에 엉덩이를 대고 있으면 스스로 배에서 물로 빠져나가던데. 불쌍한 사마귀는 그것도 모르고 머리부터 물속에 쳐박아 죽고 만다. 나도 불행에 엉덩이만 잠시 담가놓으면 될 것을 머리부터 쳐박아 자꾸 이러는 것일까.
그래. 자꾸 귀찮게 하는 부정적인 생각 쯤이야 엉덩이만 담그고 방구나 먹으라지. 이러면서도 결국 애초에 감염된 나는 내일부터 또다시 머리를 쳐박고 만다. 하하. 긍정과 믿음이 안먹히니까 병인 것이지. 이래서 우울은 빈익빈 부익부다. 혹여나 또다시 "내가 마음이 약한 탓이야 긍정적이지 못하고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생각하는 고장난 에잇톤 트럭이 또하나 있다면 나와 함께 핸들을 꺾을 차례다. 무슨 말이냐고?
따라하자. 아몰라 어쩌라고
때때로 몰라를 욕으로 바꾸기도 한다. 우린 수많은 "아몰라 어쩌라고"들에게 당한게 참 많은데, 그 놈들이 이걸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마음이 그렇게 안돼도 상관 없다. 그냥 한번 되뇌인다. "아몰라 어쩌라고." 여전히 내 마음은 시끄러울지라도 잠시나마 문을 닫고 다락방에 숨어있을 수 있는 주문이다. 빈익빈 부익부? "아몰라 어쩌라고." 많고 적음은 더 갖고 싶거나 버리고 싶은 사람들에게나 문제다. 많든가 적든가 신경 안쓰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린 때때로 우리의 우울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이번엔 무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건 해결책은 아니다. 그랬다면 난 이 글을 쓰고 있지 않겠지. 그렇지만 나름 몇년동안 트럭을 몰며 알게 된 노하우를 알려주려고 한 것이다. 당신도 그렇겠지만, 우리의 문제는 도통 참 해결이 안된다. 그러니까 우울했겠지. 그래서 아주 많은 싫은 것들을 해야 하고 누군가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역할을 수행해야하고 내 몸뚱이가 바라는 일들도 해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살겠다고 난리 버러지를 해야한다.
난 우울을 이겨내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다. 그냥 어떻게 잘 지낼까 고민하는 중이다. 잘 지내고 싶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린 앙숙이다. 으..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좀 아쉽긴 하지만 뭐 사고 안내고 때때로 속도 좀 늦추면서 경력 20년 버스기사처럼 여기저기 골목골목 돌아다니는 재미 같은 걸 찾아보려 노력 중이다. 그러다 같은 고장난 트럭을 만나면 창문 열고 "어이 형씨" 같은 거나 해볼까.
...아냐 싫어하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