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집에 들어올 때 나도 모르게 예전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가 있다. 급할 때는 예전 집 번호가 튀어나온다. 언제쯤이면 잊힐까.
예전 집 비밀번호는 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결혼했다는 사실과, 이제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생활해야 할 우리 집이라는 의미와, 적어도 결혼기념일은 챙겨보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정했지만, 살면서 제대로 결혼기념일을 챙긴 적은... 글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혼 11주년 때는 빨래건조기를 얼떨결에 선물 받았다.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선물로 하기에는 좀... 빨래 더미로부터 편해지고 좋은 점은 있었지만, 얼떨결에 받아낸 거라서 고맙긴 하나 엄청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결혼 12주년 때는 현금으로 20만 원 받았다.
결혼식 때 서로 반지 하나 나눠 끼지 않고 결혼했었는데, 10년쯤 살고 보니 반짝이는 것도 하나 갖고 싶어서, 그냥 동네 금은방에 혼자 가서 큐빅 박힌 14k 반지 하나 샀었다.
그리고 결혼 13주년 때 나는 얼떨결에 이혼에 실패한, 졸혼 상태가 되었다. 결혼 독립.
그러나 나는 결혼 13주년 때, 아이들이 잠든 새벽에 나 혼자 방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문 열린 창문 틈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방이 들어왔는데 말이 나방이지, 내 눈에는 새로 보였다. 그렇게 큰 나방인지, 새인지... 그런 생명체가 작은 방 전등 주변에 탁탁 부딪히면서 30분을 창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신없이 날아다니는데, 나는 너무 무서웠다.
한 밤중에 전등갓에 나방 같은 새가 부딪히는 소리는 너무나 컸다. 전등이 깨지던지 나방이 터지던지 할 것 같은 그 상황에서 나는 그 나방을 창밖으로 내쫓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처음엔 부채로, 그다음엔 공책으로 밀어내듯 창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나방은 시속 180의 속도로 정신없이 날아다녔고, 나는 나방의 움직임을 뒤쫓느라 시신경이 꼬이거나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지인이 주신 에프킬라 - 혹시나 모기 쫓을 때 쓰라며 주신 것 - 를 들고 나방 같은 새를 향해 뿌려댔다. 10여분이 지났을까. 한통을 다 쓰자 겨우 헤롱헤롱 대면서 날갯짓이 잦아들 무렵, 나는 겨우 밀어내듯 나방 같은 새를 창밖으로 쫓아버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런데 창문을 닫은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열었다. 아이들이 잠든 새벽, 소란스러워서 방문을 닫고 에프킬라를 뿌렸는데 온 방이 에프킬라와 냄새로 가득 차서 질식할 지경이었다. 창문을 다시 열고 어지러워서 바닥에 주저앉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방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서 나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에 눈물이 터져버렸다. 나는 바퀴벌레 하나 잡지 못할 만큼 겁이 많은데 그런 내가 혼자서 30여분을 씨름했으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힘들었다,
시골인 시댁에 가서 거미가 집안에 있으면, 시어머니께서는 '조상님이 오신 거니 죽이면 안 된다고 해서' 쫓아낸다거나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요즘에야 바퀴벌레가 흔하지도 않지만, 언젠가 어디 가서 바퀴벌레가 나왔을 때 잡아달라고 했더니 그는 '나도 벌레 무서워' 하며 피해버렸다.
나는 벌레를 참 싫어한다. 초등학교 때 내 앞에 머릿니가 바글바글한 여자아이가 앉았는데 그 아이가 조금만 움직여도 뒤에 앉아있던 내 책상 위 하얀 공책 위로 머릿니가 투두둑 떨어졌다. 나는 기겁을 했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머릿니를 옮겨와서 엄마가 머릿니 잡느라 애를 먹으셨다.
엄마한테 이르거나 선생님한테 말하거나 해서 자리를 옮겨달라고 할까도 생각했으나 그러면 누군가는 또 그 아이 뒤에 앉아야 하고, 그 아이는 얼마나 창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참았다. 짝이 바뀔 때까지.(내가 그렇게 무던하고 무식한 면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든 결혼생활도 잘 참았나 보다. 아이 셋을 낳으러 갈 때도, 너무 잘 참아서, 의료진들은 내가 출산이 임박했는지 잘 모르셨다.)
어느 날엔 그 아이의 가방에서 지우개만 한 바퀴벌레가 툭툭 튀어나오기도 예사였다.
그 뒤로 나는 벌레가 나타나면 깜짝깜짝 놀라고 긴장하며 소름이 돋는 현상이 나타난 것 같다.
그나마 살면서, 요즘엔 벌레도 집안이나 시설에 흔하게 출몰하는 게 아니라 편안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이사 온 집에 나방 같은 새가 들어와서 요란하게 돌아다닐 때는 나는 그 녀석과 맞서느라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 방에서 놓쳐서 집안 거실에 돌아다니게 되면 더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나는 빛의 속도로 방문을 닫고, 그 녀석을 창밖으로 내쫓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주저 앉았던 날, 그날이 결혼 13주년이었다.
'그 벌레는 지금 잘 날고 있을까.'
결혼 12주년에 내가 혼자 가서 산 14k 반지를 엊그제 손가락에서 빼서 목걸이에 걸었다. 빼내어버리기에는 지난 날들의 나조차 부정하는것 같아서, 목걸이에 소중히 걸었다.
아직 손가락에 남은 반지의 흔적을 본다.
고작 1년 나와 함께 했던 반지가 애잔하여, 그 흔적을 어루만져 본다.
'괜찮아. 멋지게 잘해왔어.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