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리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런데 유통기한이 무려 2주가 지난 고기였다. 나는 얄짤없이 버리는데 같이 지내고 계신 아버지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하더라도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드신다. 아버지가 드시니 나도 먹는다. 연로하신 아버지만 드시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유통기한이 지났는데 먹을 만은 했고, 함께 먹었던 식구들 모두 아직 탈이 안 난 걸로 봐서 괜찮은 것 같다. 아이들은 유통기한 지났는데 괜찮은 거냐고 계속 확인했다. 걱정되면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먹어보고는 맛이 괜찮게 느껴졌는지 상추쌈까지 해서 많이도 먹었다.
사람과의 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음식은 유통기한 몇 일지나도 먹을 수 있는 데('유통'의 기한이므로). 사람은 유통기한이 지날 경우 다시 만나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어떤 면에서는 만나지 않는 것이 편한 관계도 있고.
유통기한이 지나 처분되는 먹거리들을 보면 그렇게 씁쓸할 수가 없다. 음식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은 음식쓰레기통으로 처박혀 버려지는 재료들을 본 적 있다. 집 근처 대형마트였는데 해산물, 육고기, 채소, 과일들이 유통기한을 넘겨 버려지고 있었다. 버려지기 직전에 헐값에라도 판매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버려지기까지 생산, 운반, 포장, 진열, 폐기까지의 시간과 인건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버려지는 것은 한순간이고 일말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게 맞겠지만, 버려질 때 그 순간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이다.
더 이상의 쓸모가 없다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소용이 없어서. 의미가 없어서. 상관이 없어서. 필요가 없어서. 관심이 없어서.
이 지구 위에 존재할 필요 없다는 것은 사람이라고 예외일까.
오죽하면 '지구를 떠나거라'는 유행어도 한때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으니.
존재와 필요. 그것은 누가 정하는 가.
존재와 필요는 '필요'에 의해서 생기는 것 아닐까.
이 지구 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필요, 이 지구 상에 음식이 존재하는 필요, 이 지구 상에 가족이 존재하는 필요.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C.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 많은 남자와 결혼한 죄 많은 여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많은 환자들 중 하나였고, 아직까지 치유받지 못한 남녀들이었다. 거기엔 닦아 주어야 할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박 닦아 내야 할 얼룩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서로의 얼룩을 닦아주어야 하기 때문은 아닌 걸까.
혼자서는 닦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서.
천국에서는 기다란 젓가락으로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곳은 천국이 아니어서, 서로의 눈물과 얼룩을 닦아주어야 하는 고난의 땅인 것은 아닐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의 얼룩을 닦아주기 위함일까.
*** 나와의 짧은 유통기한을 거치고 지나 보낸 인연들에 아쉬운 미련과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