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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Jan 18. 2020

명절이 되면 생각나는 친정엄마

우리 엄마는 7남매 장남에게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고생을 있는 데로 다 하셨다.

내 기억에도 선명한 것은 명절 때마다 작은 어머니들은 아침 늦게 와서 점심 먹고 친정 간다고 떠나시는데, 우리 엄마만 부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덩달아 나도 외갓집에 명절이라고 가본 적은 없고, 명절 아닌 날도 가본 적이 없다. 내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맞벌이로 일하셨던 엄마는 명절 외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는데, 명절엔 부엌을 차지하고 있으니 엄마라고 왜 외할머니에게 가서 안기고 싶은 순간이 없었을까, 엄마를 생각하면 그 부분이 정말 안타깝고 슬프다.

내가 크면서 엄마와 함께 부엌 차지가 되었다. 엄마를 도울 일손은 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르고 상냥한 작은 어머니들은 할머니께 돈봉투를 쥐어드리며 하하호호 인사하고 떠나실 때, 엄마는 소처럼 부엌에서 일하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그래도 며느리 사랑하셔서 '일 그만하고 앉아라'하셨는데, 할머니는 명색이 시집살이를 시키신다고 '시집왔으니 소처럼 일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 시절의 고생담이야 풀면 끝이 없지만, 명절 때마다 나는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시던 엄마의 멋진 모습이 떠오른다. 손이 빠르고, 음식을 잘하시고, 배려하시고 따뜻하시고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뒷말이 없으시고 예쁘고 곱던 우리 엄마는 명실상부 훌륭하고 좋은 맏며느리였다.

엄마의 희생으로 온 가족 명절 역사가 풍요롭고 편안하고 맛있었으니, 엄마를 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 명절 풍경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봉양했던 엄마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 시어머니마저 돌가시던 날, 나는 그때서야 화가 났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할머니만 남으셨을 땐 그래도 시어머니의 눈이 있으니 며느리들이 팔걷어부치고 장례식 마치고 일하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누가 보던 안 보던 변함없이 일하는 사람이 엄마밖에 없었다.

다들 이 사람 저 사람 둘둘 서서는 무슨 좋은 일 있는지 수다에 하하호호 웃으며 먹으며, 뒷정리와 남은 음식들을 배분하고 챙기고 마무리하는 것은 엄마 혼자였다.

너무 힘들어서 그 하얀 백옥 같은 얼굴이 누렇게 떠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몸으로 일을 감당하시는 엄마가 그 순간에 나는 짜증이 났다.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성인이던 나도 모르는 척 서있었다. 작은 어머니들을 (마음속으로) 째려보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그 순간에는 며느리들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작은 아버지들아버지 돌아가시자 장례식 후에 멱살 잡고 싸움이 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하는 것 투성이지만, 부모님 살아계실 섬기길 다하라, 돌아가신 뒤 하고 싶어도 못하니.


그런 면에서 우리 이모의 처사는 훌륭하다.

나 죽으면 무덤 앞에 와서 제사 지내지 말고, 한 달에 용돈 00만 원씩 보내라! 선포하신 이모.


명절을 앞두고 벌써 머리 싸매고 주저리 하는 며느리들 중에 내 입장은 외다.

독립만세.

우리 모두 살아서 만납시다. 누구 하나 죽이지 않고, 나도 죽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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