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의 공주님은 이제 안녕
옛 추억에 이별을 고함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 앞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서 공주님 같은 분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꽃무늬 원피스가 하늘하늘 춤추는, 핑크색 양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른쪽 어깨에는 바이올린 가방을 멘, (혹은 첼로였나?)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예쁜 구두를 신고, 목소리도 어여쁘신 그 공주님이 부산 토박이 꼬마인 나에게 서울 말씨로 물었다.
"얘, 00 병원이 어딘지 아니?"
00 병원은 당시 우리 동네에 새로 지어진 5층짜리 병원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계발이 되기 전인 조용한 동네에 지금으로 치면 병원 빌딩이 지어지니 의리의리 했고, 우리 동네에 그 병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싶었다. 어린 나도 알고 있었으니.
그래서 친절하게 조그만 손을 쭉 뻗어서 이리저리 가시면 된다고 알려드렸다. 그랬더니 그분이 해님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그것은 내 인생의 한 장면이 되었다. 모름지기 여자아이가 크면 그렇게 어여쁘게 자라게 되는 거라고 상상했다. 옷은 그렇게 입고 화장도 그렇게 하고, 그런 모습이 정말 예쁜 모습이라고 믿었다.
그 뒤로 나는 그분을 본 적이 없었지만 기억에는 오래 남아서 언제 떠올려봐도 그때 그 공기, 바람, 날씨, 햇살까지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그분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때는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지나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야, 나는 그분이 누군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병원의 원장님의 아내, '사모님'이었다는 것을.
집에 모시고 있던 할아버지께서 위독해지셔서 급하게 그 병원으로 옮겼었다. 일요일 아침에.
마침 병실에는 나와 의식 없는 할아버지만 있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들어오더니 벼락같은 목소리로 누구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아니, 아침부터 재수 없게 송장 치를 일 있어? 이 환자 여기 들어오게 한 사람 누구야? 간호사?" 하시며 간호사를 찾으러 가는 듯 나가셨다.
그때 나는 오버랩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공주님이 바로 그 사모님이라는 것을.
바로 할아버지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는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도 말했다. 아무리 죽을병에 걸리고 세상 병원이 다 사라지더라도 그 병원에는 가지 말자고. 그 병원은 10년째 유령처럼 그 자리에 아직도 서있다. 병원을 내놓았지만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덩그러니 자리만 지키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틱하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병원 건물을 통째로 사버리면 되는데, 나는 다행히 그 정도로 치를 떨지는 않고 그런 욕심도 없다. 다만, 씁쓸한 기억으로 이제는 흉물이 되어가고 있는 그 건물을 내 유년시절 동화에서 지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해마다 감기가 걸려 나는 그 병원의 단골손님이었다. 어느 날 함께 병원에 갔던 아빠가 '이 병원은 올 때마다 만 원이네'하셨을 때, 내가 말했다.
"아빠, 병원비가 그렇게 비싸요?"
그 말에 간호사님과 의사 선생님과 아빠가 다 웃으셨고, 갈 때마다 '오늘은 병원비가 만 원 아니란다' 하시면서 놀리셨다.
병원을 너무 싫어했지만, 그래도 그 병원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녔었기에 그 병원에는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추억도 담겨있다.
이제는 조용히 접어야겠다. 내 추억 속에 흉물처럼 남아있는 기억들을 정리하려다 보니, 그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동화 속의 공주님도 이젠 안녕.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그때 정말 저는 충격받았고 슬펐어요.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