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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며 자라는 언니

꿈 하나, 꿈 둘, 꿈이 자란다

by 아인잠

아는 사람들은 글을 쓰는 엄마인 저보다는, 그림 그리는 저의 딸에 더 관심을 갖고 집중하곤 합니다.

어릴 때부터 종이란 종이에는 모두 큰아이의 그림이 있었어요.

그저 버려지는 종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버릴 거라면 그림 하나 그려서 버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색연필, 사인펜, 파스텔, 물감, 파스넷, 등등 종이도 종류별로 갖춰주려고 노력했어요, 아이가 관심을 보이고 즐거워하는 것을 마음껏 하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하다못해 대출광고 메모지에도 아이는 그림을 그려 넣고 좋아했어요.


학교에서 만들어오는 모든 물품에도 아이의 이름 대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요.

집에서도 시간만 나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놀이이자, 미술이자, 휴식이자, 취미가 되었어요.

엽서도 직접 만들어서 우리가 하고 싶은 말들을 서로에게 쪽지로 전해주기도 했고요, 그러기 위해 항상 엽서 담당은 큰 아이가 맡아서 하곤 했어요, 나중엔 동생들도 참여했지만, 동생들은 그렇게 길고 오래 변함없이 그림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림은 큰아이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의미가 있어요, 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할 줄 알기 때문이죠.

너무나 많은 그림을 한결같이 1년 12달 365일을 수십 장 그리니, 최근까지도 뭘 어떻게 저장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잘 못했어요, 없어진 그림도 많고요... 그저 핸드폰 속에 남아있는 사진만이 고맙고 소중한 자료로 보존되어 있긴 하지요.

그림뿐만은 아니었어요, 종이로 뭔가를 하는 것은 다 좋아했어요, 만들기, 꾸미기, 오리기, 쓰기,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온갖 노트에도 그림이 넘쳐나서 담임선생님께 문의(?)도 많이 받았어요. '어머님께서 학습에도 관심을 좀 기울여주시면 좋겠다'는 뉘앙스였지요. 하지만 저는 줄기차게 올곧은 마음으로 생각해요, 공부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 하는 놈만 시킨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는 아이도 아니에요. 오히려 선생님을 긴장시키고 부담을 느끼게 할 정도로 집중력과 탐구력이 우수한 학생으로 성장해주었어요.

아이는 저에게 글 선생님이 되어주기도 해요. 제가 상상하지 못하는, 표현하지 못하는 글들이 아이를 통해서 많이 나와요.

마음이 봄날처럼 따뜻하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너그럽고
세상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그림을 너무 그려서, 과연 괜찮을까 걱정한 적은 없지만, 주변에서는 저 대신 걱정해주느라 오지랖을 있는 대로 펼쳐주시는 분들도 있긴 했어요. 그러나, 아이를 한 번이라도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이 아이의 매력에 빠져버립니다.

저는 그것을 지켜주고 싶어요,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지켜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런 힘도 키우기를요.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해
아이의 그림 속에서는 웃고 울고 지내왔던 모든 세월이 그저 감사하고 감사하고 충분하게 느껴집니다.

제 꿈은 이 아이들이 많이 웃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동화.

지금부터는 잔혹동화.





뭔 애가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서 산후우울증 직전의 나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스케치북에 그리고 또 그려도, 돌도 안된 아이의 손에 맡겨진 스케치북은 하루에 10권도 모자랐다. 그래서 안방 벽 한 면을 온통 화이트보드 시트지로 발라버렸다.

과연 이 아이가 자라서 그림이라는 것을 그리게 되기는 할까. 어째 매일 수백 번 수천번을 그려대는 것 같은데 한 달 두 달이 넘도록 동그라미도 제대로 못 그리는 것 같아.


아! 미술 실력은 나를 닮았나 보다.

겨우겨우 문어, 토끼,고래,에디,아빠를 그려주었다. 퇴근이 늦어지는 아빠를 기다리다 눈이 자꾸 감기는데 아이는 밤 11시가 넘도록 잠을 안자고 계속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같은 그림을 지웠다가 그려주고, 지웠다가 그려주고, 어쩌다 내가 먼저 까무룩 잠이 들면 아이 혼자서 조그만 손으로 그림을 지웠다가 그렸다가 하다가는 보드라운 숨을 내쉬며 잠이 들어있었다. 그 아이를 끌어안고 미안해서 운 나날들이 너무나 많았다. '엄마가 미안해, 짜증내서 미안해, 그림을 더 많이 그려줄걸, 자꾸 그만하고 자자고 해서 미안해, 잘 그렸다고 더 칭찬해줄걸, 더 많이 기뻐해 줄걸, 엄마가 지친 표정 보였다면 미안해 아가'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드디어 혼자서 사람 비슷한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나의 바닥났던 체력이 지하 암반수를 뚫고 지구 맨홀 직전까지 처내려 갔던 것이!

이랬던 아이가 이제 중 1이 되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으로 꿈을 꾸며,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큰 아이가 태어났을 때 신생아 황달이 심해서 1주일간 입원해있었다. 그렇게 떨어져 있었던 1주일을 통해 아이가 건강히 성장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 1주일이 살아가는 내내 아깝고 그립다. 그 일주일을 안아주고 조심스레 입 맞추고, 그 조그만 손가락을 만져볼 수 있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이와 떨어져있었던 그 1주일 동안, 엄마 뱃속에서 떨어져나와 혼자 병원 인큐베이터 속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엄마는 모르니까, 그것이 미안하고 보고싶다, 그 시절 하루하루 달라졌을 내 아기.

(사실 1주일 지나 퇴원할때 가보니, 1주일 만에 아이 얼굴이 바뀌어 있어서 '정말' 내 아이가 남의 아이와 바뀐 줄 알았음.)


그러나, 다행히(?) 과거로 갈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돌이키고 싶은 순간을 만들지 않는 것이, 신이 내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믿는다.


감사하며 사랑하며 잘 키우도록 돕... 는다기보다는 나부터나 제대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힘으로, 그들이 꿈꾸는 모습으로 자라 갈 것이라 믿는다. 엄마가 민폐만 안된다면, 그리할지라도, 아이들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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