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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Apr 24. 2019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어떻게 살고 싶니?"

첫째 아이가 3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흔히 말해 어느 부촌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 기회가 생겼었는데 가만히 보니 예닐곱 명 아이들이 한쪽에 몰려가서 웅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에 관찰해보니 이쁜 강아지가 산책 나온 것을 보고 아이들이 달려가서 예쁘다고 좋아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아지가 얼마나 이쁜지, 놀이터의 모든 아이들이 달려가서 강아지를 들여다보았고, 한쪽에서는 강아지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흐뭇한 모습으로 그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많이 몰려 있어서 조금 있다가 나도 첫째 아이와 가볼 요량으로 몇 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강아지와 이야기 나누던 무리들이 다시 자기들 놀이 영역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가봐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서, 안 그래도 아까부터 강아지를 보고 싶어 안달인 첫째 아이의 손을 붙들고 몇 발자국을 걸었다.

이제 곧 강아지를 볼 수 있을 거라며 들뜬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제 10미터... 5미터... 우리 눈에 하얀 털을 예쁘게 기르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 강아지 주인 여자가 강아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이렇게 말하며 가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가자, 예삐야!~ 개나 소나 다 만지려고 하면 안되지.”    

 

내가 설마 잘못 들은 걸까?

그 여자는 우리의 행색을 보아 (그렇게 남루하지 않았으나 부촌 주민들과는 확실히 다르긴 했었다) 우리를 자신의 아파트 이웃이 아닌 완벽한 타인으로 인식한 것이었고, 나와 아이는 순식간에 ‘개나 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 얘기는 내 가슴속에만 묵혔다. 그렇다고 3살 아이에게 말해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런 이야기는 굳이 주변 사람들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몇 년이 흘러서, 나는 가끔 강아지 관련해서 대화 나눌 기회가 이어지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때로는 분위기 전환용이나 대화를 이어가고자 할 때 웃으며 이야기한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때의 일이 갑자기 또 떠오른 이유는, 요즘 자존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남이 나를 ‘개나 소’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내가 ‘개나 소’가 되는 것이 아니듯

남이 나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서 내가 ‘소중한 존재’로 느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존감'이 아닐 것이다.




몇 해 전 방영된 유명한 드라마가 있다. <파리의 연인>에 보면, 아는 사람은 아는, 꽤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여자들은 그런 상상하거든요... 화려한 사람들 속에 나 혼자 시든 꽃처럼 앉아있을 때 근사한 남자가 나타나 내 손 잡아주고 내 머릿결 쓸어주는 상상..."

나는 그런 상상은 안 해봤지만

시든 꽃처럼 앉아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은 몇 번 있었다.

내 처지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내 일이 나를 주저앉혀서 눈물은 나지 않지만 울고 싶고

웃고 싶지는 않지만 웃고 있는, 나만 아는 움츠러들고 나 자신이 작게 느껴지는 그런 상황...

돌이켜보면, 그럴 때 나를 일으켜주었던, 웃게 했던, 가만히 손잡아주는 것 같은 그런 따뜻한 상황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회식 중이었는데 엄앵란 선생님께서 무심코 하신 말씀

"너는 이마가 참 이쁘구나"


'선생님,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라고 인사했을 때

'오호호호 홍 고마워 고마워" 하며 웃으시던 전원주 선생님


"오매~ 방송국 다니며 이렇게 이쁜 작가는 처음 보네..." 하시며 과일을 깎고 있던 내게 "과일까지 이쁘게 깎어?"라고 웃으시던 남진 선생님


그분들은 나를 스쳐 지나가신 분. 나를 알지도 못하고 기억에도 없겠지만 그 짧은 상황은 지금도 내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며 그 당시 힘들었던 내게 툭툭 털고 지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셨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짧은 순간이라도 내게 눈길이 머물렀다는 건 당시 내겐 따뜻한 햇살 같은 관심이었다.

방송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막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움직여야 할 때이기도 하다. 아무도 나에게 눈길 주지 않고 내가 하는 일이 빛이 나지도 않으며 칭찬받을 일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웃으며 건네 오는 말 한마디는 큰 관심이고, 칭찬이고, 위로였다.

그런 상황 상황들은 나를 일어나게, 나아가게, 해내게 만드는 네 잎 클로버 같은 행운이었다.


당시 사무실의 부장님 자리에 다 시들어 말라가는, 죽어가는 화분이 많았다.

어느 날 부장님이 나에게 앞으로 그 화분들에 물을 주라고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고 지나가셨다.

여기저기서 받은 선물들, 받아두시고 관리하지 않으셔서 메말라가고 시들어가고 죽어가는 화분들...

그땐 나도 바쁜 중에 '네'하고 대답만 하고 지나갔고 부장님도 잊은 듯 그렇게 지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야근하다 무심코 그 화분들을 보고 있는데

뭉클.. 눈물이 났다. 꼭 나 같아서...

아무도 눈길 주지 않고 죽든 살든 관심을 두지 않으며, 마치 스스로 죽을 때 되길 기다리는 듯이 보이는 그 화분들이 나와 같아 보였다.

그래서 물을 주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그러던 어느 날,

어느새 부장님 자리 주변은 마치 숲처럼, 화분엔 잘 자란 화초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놀라고 부장님도 놀라고 그래서 어느 날 물으셨다.

"이 화분에 물 준 사람이 누구야?"

그래서 당시 선배가 나를 가리켰고 부장님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시며 이렇게 얘기하셨다.

"물을 진짜로 줬단 말이야? 이야.. 죽어가던 화초가 나무가 되었네..."


화분에 물을 주면서, 화분에 잘 자란 화초로 생기가 돌듯 나에게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오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화분들 위치를 바꿔주기도 하고

어제 햇빛을 많이 본 화분은 뒤로 옮기고, 어제 그늘 속에 있었던 화분은 앞으로 옮기고

물을 한번 흠뻑 줘야 하는 것들, 1주일 간격으로 줘야 하는 것들, 매일 어루만져 주면서

아기 돌보듯 하며 일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 그 일이 다 감당되었다.


언젠가 어디 가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분이 말을 거셨다.

"무슨 일 하던 사람이에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이런 일 해도 되는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인재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해도 빛이 나는 법이죠"

그 말 한마디가 자존감 바닥이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큰 용기를 주셨다.


그런 기억들이 문득문득

내가 움츠러들고, 하는 일이 잘 안되고, 기분이 다운될 때 생각이 난다.


'내가 어느 곳에서 관심을 받아야 기쁜지, 내 정체성과 자존감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결혼 전에는 잘 몰라. 결혼 전에는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고 쉬고 싶어서 내면의 소리를 못 듣는 거야. 그러다 애 하나 낳고 나면 무슨 소리가 들릴 거야. 그때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때 네가 뭘 하며 살지 다시 결정해.' - <언니의 독설>, 김미경


***내맘에say : 나도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기회를 주는,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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