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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by 아인잠

우연히 보게 된 <지금은 서툴러도 괜찮아>라는 책에서 경제 칼럼니스트 정철진 씨의 글을 만났다.

나는 요즘 그가 쓴 ‘봄날은 간다’라는 짧은 제목의 글을 통해 나를 지나가고 있는 봄을 마주하고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이 했던 유명한 대사이다.

변해버린 사랑, 변해버린 나, 변해버린 우리 앞에 망연자실 서서 툭 떨구어지는 눈빛.

눈물도 아래로, 심장도 아래로, 힘없이 내뱉는 짧은 말도 아래로 향해 떨어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자 친구와의 이별로 힘들어하던 그에게 연극반 여자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왜 항상 ‘봄날은 간다’라고 하는지 알아? 그건 봄날이 왔다고 느끼는 그때가 바로 봄날이 지나가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야. 사랑도 비슷해. 사랑은 오는 순간 이미 지나간 거야. 이제 그만 순순히 보내줘. 봄날도, 사랑도 가야 또 오는 것 아니겠니.”


선배의 말을 통해 삶의 여유를 되찾은 그에게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이번에 다가온 이별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뇌종양을 앓다 돌아가신 5월, 택시에서 흘러나온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 노래를 통해 그는 잊고 있던 ‘봄날은 간다’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전처럼 힘들어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봄날은 항상 가는 법이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꼭 버텨내기를. 그러니까 자만하지 말고 패자에게 꼭 술 한 잔 건네주기를. 그러면 더 밝고 환한 봄날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앞에 다가와있을 것이다.”


봄날은 가는 게 어울린다. 가는 봄을 보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가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가는 마음도 막을 수 없다. 가서 오지 않는 마음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봄이 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가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떠나간 마음도 잡을 수가 없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봄은 가기 전에 사방팔방 아름다운 꽃을 틔우고 온갖 생명을 일깨워서 세상을 뒤집어놓는다. 마치 가기 전에 폭죽을 터트리듯 온 산천에 꽃들을 피워낸다. 그렇기에 가는 봄이 더욱 아쉽다. 가는 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꽃세상을 좀 더 오래 보고싶고 꽃 안에 있고 싶어진다.

생명은 전염성이 있어서 가지를 뻗고 씨앗을 퍼트리고 열매를 맺지만, 계절은 그저 때가 되면 가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해낸다. 때로는 지나가 주는 것이 도움이 되고, 예의가 되는 만남이 있는 것 같다.

만날 때 헤어질 것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헤어지면서 만날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길을 가다 보면 어느 길에서 만나지는 때가 오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않으려 한다.

꽃이 피고 저물 듯, 계절이 지나가고 다음 계절이 오듯, 봄은 지나가야 한다. 가는 봄을 보내며 봄이 남기고 간 내 삶의 행복과 추억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다. 그것이 봄이 내게 남기고 간 씨앗이다.

책갈피 사이에 끼워진 오래된 나뭇잎에서 그 해의 가을이 느껴질 때, 내 마음은 이미 가을 속으로 들어가있다. 마른 꽃잎을 들어 향을 맡아보아도 그때의 향과 지금의 향이 다르듯이, 삶은 책갈피에 끼워진 오래된 낙엽과 같다.

수분이 말라야 썩지 않고 형태를 보존하듯이, 삶의 눈물이 말라야 오롯이 내 마음이 들여다보인다. 눈물에 굴절되지 않은 모습의 온전한 형태로. 삶은 책장 하나 만큼 얇은 내 인내심으로 채워져 간다. 그 와중에도 내 인생의 책이 두꺼워져 갈수록 많은 이야기들이 담길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는 가는 봄을 견디며 흘린 눈물도 담기고, 여러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흔적들도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책을 써나가는 것이 가는 봄을 견디는 힘이다.

봄날은 간다.

사랑도 변한다.

그렇기에 짧게 머무는 봄이 더욱 소중하고 변하기 전의 사랑이 애틋하다.

와주었던 봄에 감사, 머물렀던 사랑에 감사.

그것이 내가 봄을 보내며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가 아닐까.


봄의 여신 by 아인잠's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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