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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 혼자만 작아질 때

by 아인잠

아이들이 어릴 때 재미있게 읽으며 자랐던 동화 중에 <칫솔맨, 도와줘요!>라는 책이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작가의 이름은 본 듯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지구별 어른, 어린 왕자를 만나다>, <도시에서 사며 사랑하며 배우며> 등의 책을 쓴 정희재 작가의 책이라는 것을.

그런 저자의 또 다른 글을 우연히 최근에 읽었다.

<지금은 서툴러도 괜찮아>라는 책에 담긴 짧은 글에서였다.

그녀는 이십 대 후반의 한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나름 본인이 유도했던, 글을 쓰기 위한 유배생활이었다. 그러던 중 시골 엄마의 집에서 글을 쓰며 생활하면서 엄마에게서 들었던 말을 글로 남겼다.

어느 날 걸려온 아들의 전화에 엄마가 이렇게 말씀했다고 한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더란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가 꼴딱 넘어가기만 하면 안심을 했느니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해 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러나 그 뒤에 속으로 삭인 뒷말이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차마 그 말까지는 힘든 아들에게 할 수가 없어서, 왜냐하면 말하지 않더라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어머니는 뒷말은 삭인 채 자식에게 필요한 기운을 북돋아주는 말을 하셨을 거라고 작가는 글에서 밝혔다.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한동안 다음 줄로 읽어 내려가지 못하고, 나의 시선도 그 지점에서 멈췄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던 엄마는 그런 세월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내다보면 미리 겁먹기 쉽다는 것을'.


'월세를 줘야 하는 날짜는 얼마나 빨리 다가오던지...'

예전에 엄마가 지나가면서 하셨던 말씀인데, 나도 아이들과 지내면서 매월 느끼고 있다.

정말 시간이 잘 간다. 예전에는 시간의 개념이 원고 마감 날짜나 월급날 기준으로 흘러갔다.

월급 받은 다음날부터 1일이었다. 또는 원고 마감일 다음날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1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바뀌었다. 월세 낸 다음날부터 1일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매월 6일이 첫 1일이다. 그때부터 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내가 생각할 때에 대견한 것은 비록 1번은 선배에게 월세를 빌리긴 했지만 머지않아 갚았고, 지금까지 1년이 되어가는 동안 월세를 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정말 대견하다.

예전에 자취하면서 직장 다닐 때는 월세를 낸다는 사실을 대견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 한 몸, 일해서 번 돈으로 월세 내고 생활하고 정신없이 일하기 바빴다. 그런데 요즘은 매일매일 대견하다.

월세 내는 것도 대견하고, 관리비 내는 것도 대견하고, 장 봐서 아이들 먹이는 것도 대단하고, 밤을 새워 글을 쓰는 것도 대단하다. 글을 쓰는 것은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한 번씩 앓는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돈을 모아서 월세를 내고 세금을 내고 아이들을 먹이는 것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다. 예전처럼 엄마라고 밥을 줄여서 물로 허기를 달래진 않지만, 내가 줄이는 것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잠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잠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별명이 '잠보'인 적도 있었다. 한때 공부하느라 잠을 줄 인적도 있지만, 그건 한창 공부가 필요했던 입시 전이었고, 내가 잠을 줄여서 뭔가를 이뤄낸다는 것은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그만큼 글은 나에게 중요하다. 글을 쓰는 것은 연애하는 것과 같다. 글에 내가 잘 보였으면 좋겠고, 글에 내가 차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에 내가 예뻐 보였으면 좋겠고 글에 내가 사랑받고 싶다.

글이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글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

글을 만나면 설레고, 글과 헤어져야 할 때는 아쉽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글을 생각하고, 눈을 감을 때에도 글을 생각한다. 글은 평생 함께하고 싶은 친구이고, 반쪽이다.

이런 내가 글을 써서 먹고살고 글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게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그런 글을 쓰면서 월세를 내고 돈을 마련하는 것은 때로는 조마조마하게 가슴 졸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월 월세를 내고 나면, 한 달도 잘 버텼다 하고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1일을 살아간다.


지금은 이제 적응이 된 것 같다. 조마조마한 것도 간당간당한 것도 아슬아슬한 것도... 그래서 내 간의 크기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다. 뭐 먹고살지? 어떻게 살지? 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쓰는 것, 열심히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 지금 내가 생각할 것은 그런 것들이다.


누군가는 분명 이 순간에도 몇만 원이 없어서 쩔쩔매고 막막하고 고단한 현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을 오가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분명, 끝은 다르게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의 끝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 한가닥 희망에 모든 걸 걸었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줍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내가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으나 나를 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뀌면 나를 둘러싼 세상도 바뀐다.


힘들 땐 이 글을 보았다. 열 번이고 백번이고 썼다.

"자꾸 커지는 세상에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밤에 문득 눈을 뜨면 앞으로 살아 내야 할 삶이 무섭습니다."

- <다시, 봄, 장영희> 중에서


그러고 나면 희한하게도 용기가 났다. 쓸수록 더 무서운 것이 아니라, 쓸수록 가벼워졌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고민의 무게가, 절망의 무게가 덜어지는 듯했다.

다시 또 힘들다고 느끼게 되면 내 안에 잡동사니를 덜어내는 일, 그것부터 시작할 일이다.

그럴수록 직진 by 아인잠's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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