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은 나의 길'을 가기 위한 선택
‘판이 바뀌었다.’
나의 이혼 소식을 듣고 지인이 해주신 말이다.
나의 글을 통해서 소식을 접하신 그분은 내 글을 보면서 예감하셨다고 한다.
“이미 판이 바뀌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앞으로 더 잘되실 거예요.”
나의 판은 이혼 전과 이혼 후, 아니 독립 전과 독립 후로 나뉜다.
어디서 듣기를 '결혼한 상태에선 내 주머니에 돈 들어올 일이 없다'더니, 남편으로부터 벗어나자 없고 없고 없는 중에도 신기하게 주머니가 채워졌다.
은행에 가면 누구 하나 나에게 대출해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은행에 담보로 내세울 것이 남편밖에 없는데, 이혼하는 마당에 남편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상황도 안되었던 것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주부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을 또 알았다. 소득 없고 담보 없는 주부는 만 원 하나 대출받을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작가’인 프리랜서는 대출 앞에서 전혀 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지인 신용이 있었고, 지인 찬스가 있었다. 지인 대출을 이용하고 지인을 통해 기회를 얻었다. 밑천을 얻었고 용기도 얻었다.
“모든 삶에는 전환점이 있다. 선택이 필요한 갈림길이 있다. 넓고 안전한 길, 보이는 직선적인 길을 택하는가. 아니면 굽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좁고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택하는가. 선택을 할 당시에는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그 여정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게 된다.”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위대한 선각자의 말이 아니다. 어떤 철학자나 정치인, 수많은 저서를 남긴 유명 작가의 말도 아니다.
앳되고 당찬 모습의 24살, 어느 골프 선수의 말이다.
2019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투어 신인왕 이정은 6 선수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글을 써서 공개했다. 제목은 ‘아직 남은 나의 길’이다.
“9살의 나이에 골프를 시작한 이정은 6은 아버지 이정호 씨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입었다. 불편한 몸으로도 아버지는 승합차를 운전하고, 장애인 탁구 선수로도 활약하는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해 배우고 적응하는 노력을 보여줬다. 이정은 6은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털어놨다.” (동아일보 2020.6.2.)
이름 뒤에 붙은 6이라는 숫자는 한국 여자 프로골프 투어에 가입된 동명의 선수 중 6번째이기 때문이라 한다. 다른 선수와 구분하기 위해 숫자 6이 이름 뒤에 붙는다.
내 인생에서 내 이름 뒤에는 어떤 숫자가 붙을까. 대한민국에서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몇 명일까. 요즘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알 수 있어서 알아보기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나와 같은 성과 이름까지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다.
내 본명은 흔한 성이고 이름도 특이하진 않지만, 어렸을 때 있었던 두꺼운 전화 기록부에도 성인 중에 내 이름을 가진 사람은 고작 1-2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 내 이름 뒤에는 어쩌면 10여명 정도의 숫자가 더해질 수 있을 거라 상상 해본다.
그럴 때, 숫자 빼고 내 이름만으로, 진정한 나의 가치와 내 모습을 세상에 남길 수 있을까.
내가 살다 간 흔적,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내가 이 땅에 태어나 한 일들이 나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책임 있게, 성실하게, 잘 살아내고 싶다.
적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내 아이들에게 숫자로 기억되기보다 only one 이어야 하니까.
이정은 6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이다. 이정은 6의 아버지 이정호 씨는 트럭을 운전하다 그녀가 고작 네 살 때 사고를 당했다. 이후 아버지가 보인 삶의 모습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수도 있었고,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대신 아버지는 새로운 환경에 대해 배우고 적응하며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불의의 사고에도 꿋꿋하게 삶을 개척하신 아버지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모델이자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어떤 갈림길에 설 때마다 도전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시기는 17세 때였다고 한다.
‘서울의 유명한 감독님께서 학교와 골프를 병행할 수 있는 골프아카데미 기숙사에 들어오겠냐고 제안했다. 내 첫 번째 갈림길이었다.’ 이에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계신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싫었고 걱정이 많았다. 두렵긴 했지만 움직이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미국 진출이라는 갈림길에 섰을 때에도 그녀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한국에 머물면서 KLPGA 대회에 경기하며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내가 더 일찍 고생스럽고 불확실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LPGA 투어에서 뛰거나 US 여자오픈 우승, 신인상 등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정확하게 인지했다. 어떤 갈림길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었던 가에 대해,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그녀는 확신하고 있다.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분명 두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인생을 걸어야 하는 선택에서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이에 대해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여행할 가치가 있는 길은 늘 그런 법이다. 이제 24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오래전에 배운 교훈이다.”
나도 내 선택에 확신이 있다. 후회도 없다. 누구든 인생의 전환점 앞에서 최초의 선택은 단 한 번이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크게 느껴지는 중압감과 두려움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선택과 확신에 대해 갖는 용기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이정은 6, 그녀의 용기 있는 결단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고, 그녀가 전해준 이야기들이 또 하나의 내 삶의 이정표가 됨을 느낀다.
하반신이 마비되어도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가신 그녀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더욱 힘차게 자신의 삶을 달려가는 딸,
그리고 그 삶을 보면서 내 삶의 의지를 다지는 이 순간, 우리 모두는 한 길에 서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끊임없이 물으며, 우리는 갈림길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때 누군가의 용기와 누군가의 경험이 훌륭한 맞춤지도가 되어줄 수 있기에, 그것이 ‘아직 남은 나의 길’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다시금 그녀의 말을 되새겨 본다.
“모든 삶에는 전환점이 있다. 선택이 필요한 갈림길이 있다. 넓고 안전한 길, 보이는 직선적인 길을 택하는가. 아니면 굽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좁고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택하는가. 선택을 할 당시에는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그 여정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