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람이 분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바람이~

by 아인잠

가수 민해경의 <서기 이천 년>이라는 노래가 있다


서기 이천 년이 오면 / 우주로 향하는 시대 / 우리는 로켓 타고 /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 끝없이 즐거운 세상 / 그대가 부르는 노랫소리 / 온 세상을 수놓으리
사바사바 그날이 오면은 / 사바사바 우리는 행복해요
다가오는 서기 이천 년은 / 모든 꿈이 이뤄지는 해
사바사바 행복한 그날을 / 사바사바 우리는 기다려


룰라의 '천사를 찾아~ 사바사바'가 원조인 줄 알았는데

진짜 원조는 '사바사바~ 행복한 그날을, 사바사바 우리는 기다려~ '...


사바사바... 이천 년이 지나 202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저 별 사이로 막 날아다니는 게 일반 사람들에겐 쉽지 않고, 전쟁은 여전하며 끝없이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끝없는 싸움은 여전하다. 누군가는 노래로 세상 끝까지 수놓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우리 모두의 꿈이 이뤄지진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런 날은 요원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릴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행복할 그날을...


나는 정말 '행복한 그날'을 기다렸다. 내 딸이 사춘기가 오는 그날을! 사춘기가 되면 나는 꽃을 한 다발 사서 딸에게 주려고 했다. 꽃같이 이쁘게 꽃처럼 이쁜 마음으로 사춘기의 터널을 잘 지나가 보자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꽃집도 멀고 배달시키기도 뭣하고, 꽃 주문하려니 자꾸 열이 받아서 슬그머니 꺼냈던 지갑을 다시 집어넣게 된다.


딸의 사춘기가 긴가민가 싶더니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고 있는 중인 듯 하다.

나야말로 아이들에게 잔소리 안 하기로 유~~~~ 명한 축에 속하는 엄마인데, 이 엄마에게 대놓고 '엄마 잔소리가 요즘 좀...'이라고 말끝을 흐릴 때부터 알아봤다.

아침마다 뛰어가고

숙제는 중 1이 무슨 대학 입시생도 아니고 새벽까지 하느라 잠을 안자며, 그래서 또 아침마다 겨우 뛰어나가고

학교 다녀와서 숙제부터 하라고 했더니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알. 아. 서. 할. 게'


이 말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내가 많이 하는 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내가 자주 하는 말.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할게... 근데 그 말을 내가 딸한테서 듣고 보니 진짜 어이가 없는 말이란 걸 느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빨래도 내가 해, 일도 내가 해, 밥도 내가 해, 돈도 내가 써, 네가 뭘 알아서 해?

걱정도 내가 해, 짐작도 내가 해, 결정도 내가 해, 보호자는 나야.

네가 뭘 알아서 해?

숙제 안 하면 엄마한테 문자가 와, 무슨 일 생기면 보호자인 엄마한테로 연락이 와. 너의 신변을 걱정하고 더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엄마야. 네가 뭘 알아서 해? 아침 내내 늦잠 자고 숙제도 안 하고 알아서 한대, 그래서 알아서 뭘 해?'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다가. 그래도 엄마인데 딸을 믿어줘야지 이제 사춘기 시작인데, 벌써부터 열 받으면 안 되지 마음을 달래며 최대한 성숙한 엄마의 태도로 본을 보여주고자 했다...

녁 내내 지켜보다가 지금쯤 숙제했겠거니 믿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자기 전에 한번 물어나 보자 싶어서... '알아서 했냐'싶어서 한번 슬쩍 물어봤더니,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에 숙제한다고 방문 닫고 들어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내 인생 좀 쉴만한 타이밍이 왜이리 없냐....힘들게 한 언덕을 넘어서니 더 큰 산이 있는 듯 하다.

이제 남편 욕 할 게 없으니 자식이 쩝...


'라면 끓여줄게, 골라봐'


너구려

(배)신라면

진(상)라면


중딩의 흑화 by 아인잠's girl



*딸아, 그래도 사랑한다. 엄마가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너의 목소리를 내고, 네 마음을 표현하는 적극성에 박수를 보낸다. 알아서 하렴~

엄마는 진짜 이 사춘기를 잘 지나가고 싶어.

조만간 꽃은 사야겠다. 마음 먹은 일이니, 사춘기의 터널 앞에서 꽃구경 한번 해보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라떼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