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바꿀때마다 내가 늘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세상이 좋아진 탓에, 언젠가부터 입체감(볼륨감) 있는 스티커가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하트 스티커를 골라서 가장 먼저 Delete 키에 붙이는 일이다.
하트 스티커가 붙여져있는 Delete 키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다.
몇~~~~년에 한 번이더라도, 노트북을 바꾸면 사양에 따라서 Delete의 위치가 다른데, 적응될 때까지는 눈으로 한 번씩 보면서 눌러야 한다.
그게 번거로워서, 아예 손이 찾아갈 수 있도록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유독 Delete 키에만.
글을 쓸 때에 Delete 는 중요하다.
글은 한 문장 한 문장, 한 땀 한 땀 장인이 황금붓으로 눌러쓴 듯 한 자라도 버리기 아깝지만,
장인이 맘에 들지 않으면 한 점의 오점도 불허하고 도자기를 손수 내던져 깨부수듯이,
글에서 사족이 될 만한 것들, 없어도 될 것은 쿨하게 지워버려야 한다.
(그러고도 못지운 사족은 더 많지만, 그나마 지워서 이 정도다 싶을만큼) 지우고 또 지운다.
지우다보면, 실컷 썼는데도 남아나는 글이 없을때도 있다.
당췌 부끄러워서 견딜수가 없다. 내가 쓴 글을 나 혼자 보기에도 오글거리고 부끄러워서 염치가 없을때는
아예 통으로 날려버린다.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방송 작가로 일할때 얼마나 Delete 되는 순간이 많았었는지, 그 세월을 견뎠기에 글 반, Delete 반의 수모를 수모로 여기지 않을 정도의 베짱을 얻었다.
처음 글을 쓰시는 분을 보면, 아.. 좀 Delete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냉정히 날려버리기에는 상처받을까봐, 대체로 많이 살려둔다. 왜냐면, 처음 글을 쓰는데 다 날려버리면 자기가 무슨 글을 썼는지조차 머리속에서 하얘지기 때문이다.
일단은 스스로 쓴 글들이 쌓이고, 그것이 눈에 보이고, 오글거리는 시점이 와야 그 글들을 딛고 다른 글들을 조금씩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초기에 나는 상당히 너그러운 강사이다.
'잘한다 잘한다~ ' 하다가 '근데 좀...'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는 Delete의 단계로 넘어가게된다.
Delete 를 사랑해보아요.
정들면 괜찮다. 그래서 Delete에 하트를 붙여두었다.
얼마전엔 바꿨다. 별표로.
한번씩 바꾼다. 기분전환용으로.
다음엔 색깔을 바꾸고...
글을 쓰면서 하나씩 이벤트를 마련해도 좋다.
Delete 를 줄여가면서 스스로, 지난번에는 10줄을 Delete 했다면, 이번엔 9줄, 그리고 8줄...
어느 순간 5줄이 되었을때 자축하는 것이다.
자기 검열 과정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스스로 어떤 글도 완성하기 어렵기에
꼭 자기 검열 과정을 거치시라고, 그 과정을 피하지 마시고 오히려 중요한 의식처럼 마주하시라고 권한다.
글의 앞, 뒤 상황에 따라 적절한 문장이면
'기분이 개떡같다.' 는 두 마디 문장도 명문이 될 수 있다.
꼭 길고 자세하게 풀어써야 잘 쓴 글은 아니다. 짧은 땐 짧고, 길땐 길어도 좋다. 마치 리듬을 타듯이,
글이 짧기만 해도 맛이 없고, 길기만 해도 읽어내기 어렵다.
짧을 땐 짧고, 길땐 길게, 다만 적절한 쉼표가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지를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Delete 와 우선 친해지기.
글을 쓰는 외로운 시간, 'Delete'가 자기검열 과정에 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