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인잠 May 02. 2019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때

백상 예술대상 김혜자 님의 수상소감을 들으며...

5월의 첫날, 브라운관을 통해 들려온 한 여배우의 수상소감에 많은 사람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가슴이 저릿한 감동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제55회 백상 예술대상의 TV부문 대상에 배우 김혜자 님이 호명되었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우 한지민씨와 함께 2인 1역을 했고, 이후에는 철없는 20대 김혜자와 할머니 김혜자로서 1인 2역을 담당하며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그런데 드라마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시상식에서 그녀의 수상소감은 드라마보다 더 감동적인 여운을 안겼다.

그녀는 외우지 못해 가져왔다며 찢어온 대본을 손에 들었지만, 대본을 거의 보지 않고 백상 예술대상의 큰 무대에서 긴 대사를 읊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노배우의 수상소감에 많은 배우들이 기립한 채 눈물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보는 이에게도 적잖은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듣고싶어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듣고싶었던 말, 또는 스스로에게 다독여주고 싶었던 말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귀기울여 들었다.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녀에게서 내가 처음 들은 말로 기억에 남아 있는 표현은 또 하나 있었다.

그녀가 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를 통해 보았던 1 문장.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며 쓴 책으로 기억한다.

책의 이야기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의 공감이 주를 이룬다.


뜨거운 태양과 함께 눈곱을 파먹는 파리들, 길바닥은 온통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지참금 때문에 딸을 낳으면 독초를 먹여 세상에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된 아이를 숨지게 해야 하는 비정한 엄마들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진 50달러의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 하루 종일 코코넛 껍질로 밧줄을 꼬고 잎담배를 말아야 하는, 눈이 커다란 소녀들도 보았습니다.

먹을 게 없어 돌산에서 자라는 시금치 비슷한 풀을 뜯어먹고 입술과 얼굴까지 초록색으로 변한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손에는 여전히 그 풀을 움켜쥐고 있는 아이들을…….

네 살짜리 아이가 마대 같은 것을 들고 제 오빠와 함께 먹을 풀을 캐러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발이 시려 엄지발가락을 잔뜩 꼬부리고서.

나는 삶에 대해 잘 모릅니다. 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잘살고 있는데, 왜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아이들이 8백 원짜리 항생제 하나가 없어서 장님이 되어야 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 있는 아빠의 배 위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머리로는 이 엄청난 불평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김혜자. 오래된 미래, 2004



그리고 오늘 새삼스럽게 오래전 그녀의 고백이 다시금 내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  
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김혜자. 오래된 미래, 2004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

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내 가슴에 난 상처와, 내 인생의 아픔과, 내 가슴에 새겨진 얼룩진 고통이 내 삶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기를,

그래서 어느 훗 날에는 배우 김혜자 님처럼 눈물 머금은 얼굴로 인생의 고백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작가의 이전글 마음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늘이 주신 축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