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나와 민서샘은 내친김에 오후 인양요가 수업도 신청했다.
인양요가는 인(음)과 양의 에너지를 교차시켜 몸의 균형을 찾는 요가다.
폴은 음의 에너지를 ‘달, 차가움, 고요함’으로, 양의 에너지를 ‘태양, 열정, 힘’으로 설명했다.
수업 전반부엔 양의 요가로 몸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후반부엔 음의 요가(인요가)로 고요히 식혀내는 구성이었다.
순진하게도 처음엔 인양요가가 오전의 파워 빈야사보다 덜 힘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폴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말을 길게 늘어놓는 걸 보며 싸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이거 겁나게 힘들 겁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중간에 쉬어갈지언정 포기하진 마세요. 쉼은 멋지지만, 포기는 멋지지 않아요.”
싱긋 미소 짓는 그를 보며 나와 민서샘은 불안해졌다.
폴의 인양요가는 말하자면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여정이었다.
폴은 우리에게 모두 조용히 눈을 감고,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높은 산을 떠올리라고 했다.
이제부터 양의 요가를 하는 동안 그 산의 정상까지 오르고, 인의 요가를 하는 동안 천천히 내려올 것이라 했다.
나는 아직 도전해보지 못한 한라산을 떠올렸다.
(나중에 물어보니 민서샘은 에베레스트를 떠올렸단다. 내가 이렇게나 배포가 작다.)
음악과 함께 우리는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정말이지 토 나오게 힘들었다.
폴이 시킨 건 유튜브에서만 보던 크로스핏 내지는 <진짜 사나이>에 나오는 유격훈련 같은 것이었다.
전신 근육을 쓰는 갖가지 동작을 15~20번씩 쉼 없이 반복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몸 곳곳에 알이 배겨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방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폴은 파워 빈야사때와 마찬가지로,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귀신같이 우리를 조련했다.
“이제 산 정상까지 40% 정도 올라왔습니다. 다들 진짜 대단해요. 자, 포기하지 맙시다!”
“벌써 70% 왔어요. 아까 20 카운트였는데 이번에는 15 카운트만 셀게요.”
“어때요, 훨씬 낫죠? 여러분은 벌써 이 미친 양 수련에 익숙해진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군대 조교와 요가 멘토 사이 어딘가였다.
입에서 신음이 절로 터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리가 풀리기 시작하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한쪽 귀가 안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 수술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이렇게 무리해도 되나 싶었다.
마음 한켠에서 ‘이쯤에서 쉬자’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는데 가슴에선 불타오르는 희열이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고 싶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넌 할 수 있다’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굴은 물론, 앞으로 툭 튀어나온 배까지 번들거릴 만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분명 힘이 들 텐데 표정만은 밝게 빛났다.
마치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음악이 더 빠른 템포로 바뀌자 그는 엄지를 치켜들며 외쳤다.
“나이스!”
그 순간, 나는 ‘빵’ 터져버렸다.
이를 악물고 버티느라 찌푸려졌던 미간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지금까지 나는 이 힘든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해내자는 데에만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저 즐기면 되는 거였다는 걸.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수련하기 시작했다.
내 입술 사이로 "하하하" 소리가 나올 땐 어쩌면 힘들어서 잠시 미쳐버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몸 구석구석 느껴지는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하면서 나는 한결 가벼워졌다.
폴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쉬어갈지언정, 포기하지는 말아요.”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웃으며 그 산을 내려왔다.
양의 요가가 끝나자 폴이 말했다.
“이제 정상이에요. 눈을 감고, 호숫가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세요.”
맑은 물속에 내 모습이 보였다.
그 안에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온 내가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구나. 결국 웃으며 버텨내는구나.
그동안 스스로 게으르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며 자책한 날이 많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맑은 깨달음이 내 안을 환히 비췄다.
한라산의 정상에 올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야호- 하고 외쳤다.
나를 향한 단단한 믿음과 사랑이 피어났다.
이어진 인요가 시간엔 팽팽히 당겨진 몸의 긴장을 풀며 천천히 내려왔다.
숨이 느려지고 마음이 잠잠해졌다.
몰아치는 양적 수련 이후의 인요가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쉼이었다.
폴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사바아사나에 들어갔다.
태양이 저물고 달빛이 샬라를 비췄다.
양과 음, 열정과 고요가 하나로 녹아들었다.
어둠 속에서 미소 짓는 폴을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우와, 정말 좋다.
발리에서 폴을 만나 ‘폴링 인 폴’이라니.
발리에 오기 직전에 백수린 작가의 <폴링 인 폴>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것이 복선이 되어 진짜로 폴에게 빠질 줄이야.
충만하고 행복한 밤이었다.
그날은 기타 소리의 여운이 잠들기 전까지도 귓가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