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 온 지 어느덧 나흘째.
아침에 눈을 떴는데 문득 이날은 수련 대신 그냥 걷고 싶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요가를 만나기 전에 나는 참 많이 걸었다.
머리가 무겁고 마음이 뒤숭숭할 때마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 무작정 걸었다.
그게 나름대로 괜찮아지는 방법이었다.
걷는 일에도 분명 명상 효과가 있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널뛰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곤 했으니까.
요가를 시작한 이후로는 걷는 날이 확연히 줄었지만 여전히 걷기는 내게 가장 오래된 수련이었다.
오전 9시에 물 한 병을 들고 찜뿌딴이라는 이름의 트래킹 코스로 향했다.
적당한 오르막을 따라 초록빛이 이어졌다.
화려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풀 냄새와 맑은 공기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아직은 낯선 땅 발리에서의 지난 수일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카페와 식당, 예술품을 파는 상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카페로 들어가 아이스 카페라테를 한 잔 시키고 숨을 돌렸다.
커피를 반 정도 마실 즈음이었다.
바깥에서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곧 세찬 비가 쏟아졌다.
카페 맞은편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천막 아래로 모여들어 담배를 피웠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갑작스런 폭우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트래킹 하던 한 가족은 서둘러 카페 처마 밑으로 들어왔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남매는 작은 나뭇잎으로 우산을 만드는가 싶더니 이내 젖은 티셔츠를 빨래하듯 쥐어짜며 까르르 웃었다.
그 장면을 카페 안에서 바라보던 나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익살스러움에 나까지 꽉 차게 행복해졌다.
카페 직원은 내가 비를 감상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더니, 시야를 살짝 가리고 있던 입구의 문을 더 활짝 열어젖혀 주었다.
비오는 풍경이 시야에 더 꽉 들어차자 비를 좋아하는 엄마 생각이 불쑥 났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비가 쏟아지면 거실 창을 활짝 열고 그 앞에 바짝 붙어 비 구경을 한다.
엄마가 이 풍경을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분명 시원하다고, 가슴이 뻥 뚫린다고 말했을 것이다.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스콜일 거라 생각했던 비는 한 시간 넘게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비가 그치길 마냥 기다리던 나는 문득 생각을 바꿨다.
'비를, 그냥 맞자.'
생각해 보니 올라오는 길에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비에 한번 더 젖는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큰 마음을 먹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팔을 활짝 벌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가다 보니 '푸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낯선 땅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나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요가 수련할 때와는 또 다른 해방감과 카타르시스.
비를 보며 좋아졌던 기분이, 비를 맞으면서는 최고조로 짜릿해졌다.
중간쯤 내려오는데 나처럼 비를 맞으며 걷는 청년들이 보였다.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비 진탕 맞고 있구나. 꽤 신나지 않아?”
숲 속에서 혼자 마음껏 비를 맞으며 내려오는 그 경험을 살면서 다시 할 수 있을까.
비에 젖은 숲 냄새, 오며 가며 마주친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황홀한 자유로움.
한국에서라면 하지 않았을 과감한 우중 트래킹이 남긴 건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시 숨 쉬게 한 자유였다.
양팔을 활짝 펼치며 신나게 걷던 이날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