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방인의 기록 13
칭다오 해변에서 칭다오 맥주를 마신다. 이 순간에도 제주도 바다와 막걸리의 조합이 그립다. “그래, 나 한국인, 제주도민이지.” 타지에 오면 새삼스럽게 이 사실이 얼굴을 성큼 내민다. 너와 내가 만났을 때 관계의 시작도 “너는 어느 나라에게 왔니?”의 물음에서부터다. 종종 내가 한국인임을, 한국의 것들(문화, 사회현상 등)을 설명해야 한다. 나 자신이 국적에 의해 규정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국에서 사람들을 판단할 때 국적은 중요한 잣대가 된다. ‘국가’라는 것이 자국에 있었을 때 보다 외국에서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국가가 뭐길래?’
문득 국민으로서 국가에 지는 의무가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드 사태는 국가 정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기력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전쟁을 막기 위하여...’라는 거대 담론의 그림자 속에는 성주 시민, 국민이 있다. 설사 전쟁을 막아준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피부로는 전혀 와 닿지 않다. 우리의 삶은 지금 이 순간 그곳에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내 가족, 친구, 공동체가 전쟁을 막기 위한 방어체제의 설치로 인한 위험을 맞닥뜨리고 있다는 것, 그들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욱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이다.
중국에 있던 나는 싸드 문제로 중국인들이 밤에 한국인들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듣자 괜스레 밤거리가 무서웠다. 어느 나라 사람이니 물었을 때 “한국인이요.”라고 대답하면 냉랭한 안색의 변화를 목격할 때마다 국가권력의 무서움을 느꼈다.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들은 싸드가 어쩌고 저쩌고 나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싸드뿐만이 아니다. 현대의 세월호 사건, 제주 강정 해군기지 설립, 근대사의 제주 4.3 사건은 국가에 의해 희생된 국민, 국민은 국가에 소속되는 조건으로 납세, 병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지만 국가는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폭로한 사건들이다. 사건은 지나간 역사가 아닌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쏴 죽이기도 했다. 재개발사업들은 국민의 생존의 공간과 수단을 빼앗고 국민을 무기력하게 한다.
몇십 년 전에 소로우는 국가, 정부에 불복종하는 행위를 벌였다. 그는 왜 자신이 국가에 인두세를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부당함을 느끼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감옥에 갔다.
나는 시민활동가는 아니다. 소로우처럼 현재 사회에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활발히 활동하는 이들처럼 적극적으로 시위하지는 않는다. 소극적이다. 그러나 소속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떠돌이 생활을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나는 한국인이다. 내 신분증인 여권에는 국적이 한국이라는 게 명확히 새겨져 있다.
‘국가라는 게 사라진다면?’이라는 상상을 한다. 국가로 규정되는 게 싫어 나는 “어디서 왔니?”라는 상대방의 물음을 피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편견이 드는 게 싫어 묻지 않는다. 무국적이 될 수는 없을까? 그게 어렵다면 마을이라는 작은 단위로 나는 어디 마을 사람이라고 타지에서 자기소개하는 걸 상상해본다. 적어도 마을이라면 작으니까 마을 사람들이 의무를 지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정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극소수에게만 이익이 집중되고, 그들이 내세우는 담론에 의해서 다수의 소수자가 희생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