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 Oct 04. 2019

낯섦, 불편함 속에 나를 놓아보기

잘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일

 사람을 좋아할 때 좀 변덕스러운 경향이 있다. 주로 지적인 면에 끌리는데 지적인 사람을 발견하면 금방 들떠서 마냥 좋아하다가도 언행일치가 안된다거나 등의 빌미를 발견하곤 배신감에 금세 실망하고 마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내 맘속에서 존경의 경지에 올려졌다가 배신의 나락으로 떨어뜨려지곤 했다. 일단 실망의 빌미가 눈에 뜨이면 '아니 어떻게 그가 이럴 수 있지?' 하며 '산다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씁쓸해하고 한껏 폼 잡고 공허해했다.


  그날도 배신감을 느낀 어떤 일화를 친구들에게 열을 올리며 얘기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듣던 한 분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준을 너무 높게 잡지 마세요. 기준이 높으니까 자꾸 실망하게 되고, 그 사람들 역시 지수 씨를 왠지 부담스럽고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거든요." 하는 게 아닌가. '어머나, 내가 그랬구나!' 사람에 대한 나만의 이상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그걸 잣대로 남들을 맘대로 판단하고는 혼자 실망하고, 비난하고 그랬던 거다. 그 기준에 스스로도 턱없이 못 미치면서 나도 모르게 남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멋대로 그들을 재단했던 거다. 인지하지 못했던 내 눈 속의 큰 티끌! 이래서 사람은 자꾸 다른 사람과 '대화'해야 하나보다. 자연스럽게 내 티끌을 보게 해 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분의 귀한 말씀 덕분에 지난날을 돌아보니 한 때 호감을 가지고 가까워졌으나 쌓이는 실망으로 결국 찝찝하게 끝냈던 관계들이 떠오르며 미안한 마음이 살며시 든다. 그분들과 소원해진 건 다분히 내 탓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요즘 연습 중이다.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과 말이 거슬리거나 실망스러울 때 또 내가 만든 기준이나 이미지 때문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고, 그래도 실망하는 마음이 커지면 관계를 끝내는 대신 가능하다면 좀 거리를 두고 시간을 보내보려 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실망감을 느끼는 타인의 어떤 행동과 말이 역설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드러내는 힌트가 되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오랜 시간 내면에 지어 온 내 '틀'을 인지하게 되는 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이나 말이 불편하다면 그 지점이 내 '틀'의 경계인 것이다. 익숙하고 편할 땐 '틀'의 안 쪽에 있어 인지하지 못하지만, 불편함을 느낄 때 감지되는 견고한 나의 '틀'! '틀' 안에서 편안하게 안주하며 살다가도 도대체 '틀' 밖의 사람들과 세상은 어떤 건지 종종 호기심이 발동한다. '틀' 밖이 궁금하면 '틀' 밖의 낯섦 속에 나를 놓아보는 수밖에. 낯설고, 어색하고, 새로운 '틀' 밖의 어떤 관계 속으로 말이다. 사실 사람은 살아오던 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라 이 첫 단계가 쉽지 않다. 그런데 다소 충동적인 나는 앞뒤를 면밀히 재지 못하고 얼떨결에 이 첫걸음을 떼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발걸음은 떼 놓고 뒷감당이 안되어 곤란할 때가 당연히 많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올해 들어 두어 개 새로운 일에 관여했는데 처음 만나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시나 마음이 긴장되고 불편했다. 여력이 딸려 모든 활동에 충실하지 못하니 마음이 더 불편한지도 모른다. 관계를 끝내고 싶은 습성을 꾹꾹 누르고 오늘까지 어찌 저찌 버텨오고 있긴 한데, 그 와중에 느낀 점이 하나 있다. 낯선 사람들과 있다가 오래 지내 익숙한 사람들 속으로 돌아오면 긴장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그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깊이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익숙한 분들하고만 내내 지냈다면 그 고마움을 모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결국 새로 만난 분들과도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를 알아가며 점점 익숙해져 가는 면도 분명히 있었다.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르겠으나 포기하지 않는 한 새로운 사람들, 불편한 사람들을 이해해 갈수록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며 그렇게 나의 '틀'도 조금씩 넓혀지는 게 아닐는지.


  작년인가 "잘 살고 잘 죽는 법"이라는 주제로 백석대학교 최영숙 교수님의 강연을 동네에서 들었는데 사람이 늙는다는 건 네 가지 징후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세상에 대해 경이와 감탄이 없어지는 것

두 번째, 움직이는 공간이 점점 작아지는 것

세 번째, 할 일이 없어지는 것

네 번째,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이 없어지는 것

이 징후들에 따르면, 내가 새로운 일들을 벌이며 낯선 데 버티고 있는 것은 늙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저항인가 싶기도 하다. 저항이라도 좋고 '틀'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좋다. 나만 옳은 줄 아는 노인 말고, 사람들에게 좀 너그럽고 세상일에 지혜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 따뜻하게 나이 들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나를 만든 책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