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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Feb 13. 2020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이 왜 인기가 많을까 궁금했다. 그의 소설들을 읽고, 공감했고, 그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알고 싶었다. 나도 그의 소설을 읽고 그를 좋아하게 될까? 근자에 400여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이리 빠르게 읽어낸 적이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 연애소설이었다. 농밀한 정사장면이 졸린 기운을 싹 몰아냈다. 확실히 재미가 있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묻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답을 해보려고 나름 고민을 거듭해도 이제까지 살아온 게 무색할 정도로 잘 모르겠다. 분명 사랑 속에서 살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부끄럽다.


  주인공인 17세 와타나베는 자신이 마음을 연,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관계의 예의를 갖추고자, 또한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노력한다. 죽은 친구의 애인 나오코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미도리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조차도 병자 취급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입장에서 그에게 말을 건네고, 앞에서 오이를 먹고, 수발을 들어 드린다. 그런 태도를 미도리 아버지도 바로 느끼고 와타나베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 대 존재로서의 예의를 태생적으로 갖춘 그를 누가 안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와타나베처럼 관계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책임을 지려 하는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걸까?


  누군가와의 관계에 예의를 갖추고 책임을 지려는 태도는 추구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인간은 결국 약한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늘 흔들린다. 나오코를 따뜻하게 품어 치료해 주고 싶은 애틋함이 강한 와타나베지만, 레이코의 말처럼 바다 위에 떠있는 요트를 볼 때, 요트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배경의 하늘과 바다도 아름답다고 느끼듯이 생명력 강한 미도리도 아름답고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 걸 와타나베도 부인할 수가 없다. 남자 친구가 있는 미도리지만 와타나베와 있는 게 더 좋은 걸 부인할 수가 없듯 말이다. 자신만 아는 나가사와 선배를 사랑 많은 하쓰미가 괴로워하며 곁을 지킬 때처럼 말이다. 이런 때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진실한 사랑을 쫓아 자아의 무게와 외부 사회의 무게에 맞서는 약한 인간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된 상황이 아닐까. 하지만 모두가 그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울림이 크다. 나오코가 끝내 와타나베가 아닌 죽음을 택한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 말미에 레이코는 삶과 함께 흘러가라고 말한다. 나오코에게 느끼는 책임감과는 별개로 와타나베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 게 성장이고, 강해지는 것이라고. 어떤 관계 속에서 배우고 교훈을 찾는 동시에 삶과 함께 흘러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와타나베처럼 예의를 갖춘 관계를 갖고자 노력해 왔던가?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노력은 어디까지 해봤던가? 머릿속의 계산기는 언제든 멈추는 법이 없고, 공감력도 약하기 그지없어 여전히 마음공부는 끝도 없이 필요한데 말이다. 행복해지는 선택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관계로 인해 버겁고 아프지만, 아픈 건 아픈 대로 느끼면서도 행복하기를 선택하는 게 어렵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을 곧 앞둔 아버지의 병간호 중에도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줄 아는 미도리처럼 말이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함을 낳는 선택을 하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행복을 100% 장담할 순 없다는 게 또 삶의 아이러니이자 묘미인 것 같다. '인생사 새옹지마'말이다. 레이코의 남편이 부모와의 연도 끊어가며 레이코를 택했지만, 결국은 13세 소녀에게 흔들려 이혼을 맞은 것처럼. 하지만 이혼하지 않았다면 재혼해서 다시 행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알겠는가, 미래를.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에 대해 단정 짓지 않는 게 지혜로운 처세일 거다. 당장에는 버겁지만 좋은 결과에 이를 거름일 수 있고, 당장의 희열과 기쁨이 슬픔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사에 많이 상처 받거나 오만해질 일은 줄어들 것 같다. 너그럽고 겸손하게 살아야 할 텐데...


  이 소설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한국어판으로 우리나라에서 출판할 때 <상실의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왜 바꾸었을까?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전공투로 요동치던 일본 사회의 에너지를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도 같지만, 사실 소설을 읽어보면 오히려 40세 언저리의 나이 든 주인공 와타나베가 17세 무렵부터 20세가 되는 무렵까지, 사랑하는 친구를, 연인을 잃으며 아프게 아프게 사랑을 알아가던 자신의 그 순수한 기억들이 오랜 시간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는 데에 대한 의미로 상실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한 것 같다.


  메인 이야기 외에도, 10대 후반인 와타나베가 아무 여자들과 몇 차례 잠자리를 가지고 난 후, 감정과 에너지가 공허하게 소모되는 그 상황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는 부분도 흥미로웠고, 레이코 씨를 다시 아프게 한 위험인자로 레즈비언 성향의 영악하기 그지없는 13세 소녀의 일화도 흥미로웠다. 자기 자신에게만 온 관심을 쏟느라 받는 만큼의 사랑을 타인에게 돌려줄 줄 모르는 지적이면서도 미숙하기 그지없는 나가사와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관심도 그다지 없고, 아는 것도 없었던 일본 현대사 중 전공투에 대해 공부하며, 일본이란 나라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 계기도 되었다. 주는 메시지도 분명히 깊고 무겁다. 덕분에 그의 다른 소설들도 구미가 당긴다. 더불어 니체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잘은 모르지만,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초인의 이상향을 그려주었다 하니 그건 또 어찌 그런 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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