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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Feb 25. 2020

커피에 관한 단상

내가 겪은 커피의 효능과 부작용

  비가 온다. 베란다 창문에 빗방울이 맺혀 또로록 미끄러진다. 비 맞은 거리며, 건물들이 무겁지만 촉촉해 보인다. 따뜻한 커피 생각이 난다. 헌데, 커피를 즐겨마시는 편이 아니라서 우리 집엔 커피가 없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엔 큼직한 머그잔에 라떼나 모카를 마시면 왠지 영혼마저 따뜻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꾸 커피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커피에 관한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나에게 커피는,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 다니며 뽑아먹던 자판기 밀크커피가 시작이었다. 잠을 깨려 마신다고는 하지만 정작 졸음은 아무때나 쏟아졌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싶은 마음에 커피로 배만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 대학원 시절까지 커피는 내게 주로 사교용으로 쓰였다.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커피 핑계 삼아 사람들과 나무 그늘 아래 서서든, 벤치에 앉아서든 잠시 대화 나누는 시간들이 꽤 정겨웠다. 먹고 난 종이컵으로 컵차기까지 하면 몸도 좀 움직여 활력까지 생기니 일석 이조였다고나 할까?


  사교용으로 커피를 마시던 때가 지나고, 임신과 육아를 하며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다가 미국 살 때 다시 마셨는데, 이상하게 커피를 마신 날은 영어가 훨씬 잘 되고 속도가 빨라진다는 걸 느꼈다. 덩달아 자신감도 올라가는 듯했다. 마침 토플 시험날 아침, 그 옛날 사약이 이 정도 썼으려나 싶은 커피를 한 사발 들이켜고 갔는데, 역시나 뇌의 회전 속도와 순발력이 120%쯤 향상됨을 체감할 수 있었다. 당시 토플은 리딩이나 리스닝이 다가 아니라, speaking이 추가된 IBT 방식으로, 거의 4시간 동안 정신없이 읽고, 듣고, 말하고 써내야 하는 내 생애 최고 난이도의 영어시험이었다. 시험 결과도 좋아서, 커피의 힘을 맛보고 난 이후로는 커피 없이는 도저히 토플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공립중학교 8학년 아이들 대상으로 영작 코치(writing coach)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했었는데, 이때도 커피는 나의 귀중한 비밀 무기였다. 학생들이 원하는 주제들로 영작을 해오면, 같이 읽고 이야기하며 필요한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역할이었는데, 아이들의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 어렵고, 혹여 그들이 택한 주제가 '바티칸시티와 교황' 같이 내게 생소한 분야면 어휘도 너무 딸렸다. 어휘를 몰라도 약간은 뻔뻔하게 스리슬쩍 넘어가며 정해진 2달간 무사히 활동을 마칠 수 있었던 건 당일 아침에 마셨던 스타벅스의 카페모카나 피츠 커피의 아메리카노 한 잔 덕분이었다. 봉사활동을 끝내니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미국에서 마셨던 커피는 내게 비밀 무기이자 구세주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커피를 좋아하는 지인들과 함께 곧잘 마셨는데, 그러다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커피 효능이 있다. 바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커피를 마신 날은 별다른 운동량 증가 없이 몇 백 g씩 체중이 내려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말을 적게 한 날도 어김없이 체중이 내려가는 걸 보고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믿게 되었다. 그렇다고 커피를 매일 자주 먹으면 비례해서 체중이 내려가느냐,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몸이 커피에 적응을 하는지 체중변화의 폭이 작아지며 효과가 적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일주일에 2, 3일 하루 한 잔정도 마셨을 때 그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커피의 다이어트 효과를 상쇄시킬 많은 유혹의 먹거리들이 주변에 넘쳐나기에 나의 체중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그 어느 때보다 커피를 자주 많이 마시게 된 건 글을 쓰기 시작한 후이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대, 여섯 시간 집중을 해야 하는데 이게 또 맨 정신에 잘 안된다. 5, 6시간 되는 것도 커피 덕분에 많이 늘어난 거다. 처음엔 2시간이나 버텼나? 얼마 전에 전해 듣기로, 봉준호 감독님은 카페에서 매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이 시나리오를 쓰신다고 한다. 장장 연속으로 8, 9시간을 집중할 수 있다니 나로서는 넘사벽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쓰고 싶어도 도대체 엉덩이도, 허리도, 어깨도 너무 아프고, 머리가 버벅거려서 더 이상 안된다. 안 되는 글발을 커피로라도 메꿔보겠다는 욕심에 한동안은 매일같이 마셔댔더니 어느 날 아랫배가 싸 한게 급기야 장염이 왔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시고, "최근에 회나 조개류 드셨어요? 요즘 수산물이 오염된 게 많아서요." 하신다. '선생님, 수산물이 아니라, 커피예요....' 속으로만 말하고 어쭙잖게 웃으며 조용히 나왔다.


  장염 치료차 커피를 끊은 지 꽤 되어간다. 대부분 집에서 지내고, 외출도 드무니 커피 없이도 글을 쓰는 연습이 자연스럽게 되던 중이었다. 적당하면 고맙고, 과하면 탈 난다는 걸 커피로 또 알게 된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 내리는 빗줄기를 보니 이유 없이 커피가 당기는 걸 어쩌나... 오래간만에 테이크 아웃이라도 해서 마셔볼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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