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태어나면 정말 많은 것이 바뀐다. 나 밖에 모르던 내가 이 작고 소중한 아기를 위해 많은 걸 포기하거나 변화한다. 처음엔 이전의 나도 없고 그렇다고 좋은 엄마의 모습도 아닌 경계에서 두렵기도 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보는 이 큰 책임감도 큰 변화다. 보이는 변화 중 가장 큰 것은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난 출퇴근이 있는 고정적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내가 시간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퇴사를 했고, 몇 년 간 읽고 쓰는 삶을 위해 노력한 결과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직후엔 이메일 하나, 짧은 글 하나 쓸 시간을 내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평균 육아휴직 기간인 일 년을 쉴 수는 없었다.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의 시간은 멈춘다. 책방도 글쓰기도 공부도 멈춰 버린다.
그래서 난 아기가 백일이 지나면 일주일에 이삼 일 어린이집에 보낼 계획이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한 달 후 동네에 있는 영어어린이집 세 군데에 입소 대기를 넣었다. 좋다고 소문난 몇 곳은 이미 대기 번호가 너무 길어 포기했다. 많은 워킹맘이 1년이 지나고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경우가 많지만 3개월 휴직 후 복귀하는 엄마들도 많았다.
“어떻게 이 작은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겨요?”
“아기는 엄마가 돌봐야지. 여자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벌써 일을 해?”
“막상 아기 떼어놓고 일하러 가봐라. 갈 수 있나.”
워킹맘을 두고 본인 욕심 때문에 아기를 ‘내버려 두고’ 일을 한다고 말한다. 일을 한다는 건 여러 이유와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경제적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개인 커리어 때문일 수도 있으며 자아실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이던 간에 개인의 상황에 따라 주 양육자가 선택할 일이다. 조부모만이 협력 양육자가 아니다. 조부모가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베이비시터나, 어린이집, 시간제보육시설 등 외부에서 협력 양육자나 양육기관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한국에선 이조차도 어려운 일이다. 만만치 않은 비용은 둘째다. 인구 절벽에 도달한 저출산 국가라지만 어린이집도 대기 번호를 받고 마냥 기다려야 하고, 지자체서 운영하는 시간제 보육기관도 남는 자리를 찾아 동네와 도시를 넘나들기도 한다. 하물며 보내도 아동학대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워킹맘들은 기본적으로 죄책감을 장착하고 있다. 나 역시 어린이집을 몇 개월 아기부터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며 죄책감을 가졌다. 워킹맘은 매 시간, 매 분, 매 초 퇴사를 고민한다고 한다. 업무와 육아로 인한 육체적 고됨 때문만이 아니라 죄책감도 일조함이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워킹맘의 주당 일과 육아와 가사 시간은 70시간, 맞벌이 부부 워킹맘의 가사 분담율은 84%다. 육아는 24시간 체제다. 육아는 밤과 낮이 따로 없다. 아기의 하루가 루틴을 찾는가 싶으면 새로운 성장기에 도달하고 또 다시 바뀐다. 이런 워킹맘의 수고로운 생활은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일도 육아도 가사도 모두 해내는 슈퍼맘을 원하는 사회다. 그래서인지 워킹맘은 “괜찮아. 나를 위한 일이고, 아기를 위한 일이야.”라고 생각하더라도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자책하기 일쑤다. 이는 육아는 여자의 몫이라는 사회적 시선이 여성에게도 내재화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부모 세대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요하니까.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는 육아와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워킹맘 지선이 자신의 아기를 데리고 사라진 보모를 찾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만들며 투자자들이 했던 말을 배우 엄지원이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전했다. 워킹맘이어서 아기를 잃어버린 게 아니냐, 일하는 중에 아기가 다가오면 일을 그만하고 아기를 안아줘야 하지 않느냐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들이 도무지 지금 세상에 어울리는 말인가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 지선은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성장을 위한 일이 아닌 밥벌이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나와 남편은 육아와 가사를 함께 한다. 그리고 남편은 나의 일을 존중하며 최대한 나의 시간을 지켜주기 위해 애쓴다. 나는 이걸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 주변의 많은 사람 특히 워킹맘까지도 “네가 복 받은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라고 말한다. 내 또래의 많은 여성이 무조건적인 희생을 자신도 모르게 강요받는다. 물론 전업주부가, 오롯이 혼자 해내는 육아맘이 시대착오적이란 이야긴 아니다. “난 육아가 적성에 맞아. 내가 알고 보니 아기 돌보는 것을 좋아하더라고.” “내 아이는 내 손으로 모두 해주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다만 이제 여자의 일은 당연한 것이고 육아는 남녀 공동의 일이라는 말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아기는 엄마 품에 있어야만 행복할까. 나의 아기도 내 품에 안기길 좋아한다. 울다가도 안아주면 금세 울음을 그친다. 하지만 아빠의 품에 안겨도 편안해 한다. 아빠의 품에 안겨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난 엄마가 행복하면 아기도 행복하게 큰다는 말을 믿는다. 아기가 웃으면 엄마도 웃지만, 엄마가 웃으면 아기도 웃는다. 아기도 엄마의 행복을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