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태동이 느껴지던 날이었다. 꼬르륵 소화되는 건지 속 방귀를 뀐 건지 헷갈렸다. 그러나 또다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기가 나에게 “나 여기 잘 있어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잘 먹지 못하는 엄마여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아기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밤낮 할 것 없이 인사하는 아기였다. 아기는 태어난 후에도 똑같이 활동적이다.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다가 팔과 다리를 휘둘렀고 배를 퉁퉁 튕기며 집안을 휘저었다.
나를 닮았는지 성격이 급한 아기다. 잘 놀다가도 우유병을 보면 먹고 싶어 안달하고, 잘 서지도 못하면서 걷고 싶어 다리를 앞뒤로 접었다 뻗었다 한다. 아기가 200일쯤 된 날엔 손끝에 놓친 장난감을 손으로 잡지 못하자 온 힘을 쓰며 버둥거렸다. 한두 발만 기어가면 손에 닿을 거리인데 끝내 손에 잡지 못하니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울어버린다.
나의 삶은 누군가의 삶이 안녕하도록 진심으로 바라는 삶이 되었다. 기적이 없다고 믿던 나지만, 이젠 기적은 있어야만 한다는 내가 되었다. 혹여나 나의 힘이 닿지 못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적이 아이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면서. 내가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한 가장 큰 이유가 책임에 대한 무거움 혹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얼마간 참 많이 내가 변했다. 겉으론 “아기가 있어도 내가 우선이야.”라고 말하지만, 나의 시간과 마음은 자연스레 아기에게 옮겨갔다. 그 시간과 마음이 아깝지 않다. 아기를 돌보는 건 분명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내가 치유되는 어떤 힘이 있다.
어쩌면 아무 일 없이 살아내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삶일지 모른다. 삶은 생각보다 행운이나 행복보다 아픔과 상처가 많다. 이 글을 쓰며 내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저 작은 아이가 이 집안을 꽉 채우고 내 시간을 꽉 채운다. 내 삶의 온통을 채우고 있다. 별 볼 일 없는 나의 작은 삶일지라도 한 아이에겐 온 삶이 되다니. 그렇게 아이의 작은 삶도 채워지는 중이다.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기다릴 줄 아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먼저 말하기보다 먼저 듣고, 먼저 해주기보다 스스로 할 수 있게 기다려 준다. 건강한 창문이 되어 손잡아 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나는 천천히 해나갈 것이다.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나의 선택도 충분히 괜찮은 삶이기에.
“아가야, 천천히 해도 돼. 너무 애쓰지 마. 우리, 천천히 함께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