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 시대에 우리가 정착해야 할 공공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한 건축
"R은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쇼핑몰로 내려갔다. 서울역과 용산역이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지하 세계다. 이곳엔 없는 것이 없다. 수영장과 영화관이 있고, 다양한 F&B와 생필품 매장도 있다. 고급스러울 뿐 아니라 편안하고 편리하다. 물론 폭염이나 혹한도 TV 속의 일이다. 이곳의 기온은 항상 섭씨 20도 내외다. 그는 GTX를 타고 10여 분 거리의 삼성동 사무실로 출퇴근한다. 삼성역에서도 쇼핑몰로 연결된 통로를 통하면 사무실로 바로 이동할 수 있다. 기후의 변화는 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찾아와도 그는 항상 섭씨 20도의 쾌적한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 모두 에어컨의 마법 덕분이다. 건축과 에어컨의 관계는 점점 밀접해지고 있다. "
건축은 언제나 문명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공물이다. 일상의 삶과 맞닿아 있고, 삶에 대한 태도가 온전히 담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론 정치, 사회, 경제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속도에 대한 경배, 급속한 도시화 그리고 지구촌 문화의 전방위 확대로 지난 수십 년 간 점점 더 크고 화려한 건축, 더 편안하고 반짝이는 도시에 대한 열망에 들떴던 것은 그러기에 당연하다. 높이와 크기의 경쟁 속에서 우리 도시 건축은 보다 거대하고 세련되고 비싸고 편리한 것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막에서 21세기형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두바이나 아부다비의 놀라운 대규모 도시 개발의 사례도 그렇지만, 우리 도시의 생활공간도 ‘더 크게 더 편하게’의 구호 아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지속 가능할까?
올여름 폭염을 겪으며 지구촌이 소멸로 향해가고 있다는 전망은 보편화됐다. 환경 파괴와 그에 따른 자연재해,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는 이주민 갈등, 경제 위기로 인한 도시 빈민의 확대 등 지구적 문제와 지역적 문제가 서로 얽히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건축이 보다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차원으로 그 자리를 옮기라는 요청은 그래서 당연하다. 환경, 공유, 윤리, 행동, 실험, 관대, 임시 즉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한 실험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과시적이기보다는 자기 충족적 공간에 대한 관심을 두고, 물리적 크기를 넘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건축을 바라보라고 한다. 단순히 건물을 생산하는 것을 넘어 풍경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그 안에 속한 ‘작은’ 단위와의 관계를 설정하며, 나아가 더 큰 사회적 경제적 물리적 조직으로 우리를 연결해주는 건축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건축의 역할이 우리 모두가 불평등하지 않게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장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전 세계적인 폭염은 기후 재난 난민이 먼 나라,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초지를 잃어버린 유목민들이나 농경지와 숲을 빼앗긴 아프리카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 이웃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이번 폭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위협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런 상황은 점점 악화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특히 주거환경이 취약한 빈민들과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고령자들, 특히 홀로 사는 노인들은 폭염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한 편에서는 외기를 접하지 않고 에어컨디셔닝 된 공간에서 '시원한 여름'을 보내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여파로 좁은 쪽방에서 매년 사상 최고의 '뜨거운 여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도시가 자본 중심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공공 공간마저도 사적 공간이 되어버리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부에 대한 집착이 불길하게 성장했고, 공동의 우물은 거친 상거래로 빠르게 대체되고, 그만큼 대부분의 도시에서의 빈곤과 배제로 인한 상흔은 커지고 있다. <폭염 사회>에서 언급됐듯이, 폭염은 "우리 도시에 생긴 균열이 얼마나 깊은 것이고, 그 사이에 빠진 삶들은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도시
예술가들은 이미 ‘도시’를 그들의 작업의 주제로 삼고 있다. 소수만의 리그에 대항(against)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질문을 던지고, 특정 동네 이야기를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천착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 도시의 이면을 극대화하거나, 도시민들의 욕망을 들춰내거나, 도시의 아름다움을 혹은 추악함을 숨김없이 보여주면서, 높고 커지고 단절되는 도시에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기념비적 프로젝트가 도시를 풍요롭게 하고, 도시민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펙터클, 파노라마 등의 단어는 오히 ‘단절’의 다른 말이라고 웅변한다. 그들은 작고 소박하고 기념비적이지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은 일상에 오히려 초점을 맞춘다.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도 “건축가는 우리가 오래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우리 도시들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대규모 개발 계획을 세우는 일에 여전히 매진 중이기에 이런 화두는 울림이 있다. (그러나 서울의 거대한 꿈은 현재 초고층에서 지하 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영동대교, 서울역, 용산역 그리고 여의도 개발계획이 진행되거나 발표됐다.)
해결 방법은 시민이 주체성을 갖고 도시 문제에 참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민 개개인의 연대에 기반을 둔 도시공동체의 모습을 그려야 하고, 시민의 자발적인 운동이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서로 긴밀하게 협력할 공공 공간과 자산이 필요하다. 축출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도시에서 사회경제적 평등을 실현 과제를 풀어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동안 시민들은 도시공간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질문도 받지 못했다. 그동안 개발업자와 정부는 고밀도 주거나 공공건물을 미리 결정해버리고 사회적 이유나 경제적 효용성을 들어 그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만일 지역 주민들이 “높은 건물이 아니라 공원이 필요해요”라든가 “쇼핑몰이 가까운 것보다는 저녁에 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혹은 "더운 여름밤에 편하게 앉아서 바람을 쐴 수 있는 작은 평상을 원한다 “고 말하면 그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물론 한국에서 도시 공간의 민주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복잡한 문제와 한계를 갖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에게 건축의 가치를 판단할 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시민의 도시, 지역 공동체, 공공성 등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를 판단한 근거와 사회적 기반이 아직 부족하다.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장은 없고, 아직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관료주의와 전문가들의 폐쇄적 결정 구조 속에서 도시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공공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공 공간마저도 관광객이 우선권을 갖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건축과 도시 공간은 돈벌이를 위한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시민들은 이런 스펙터클을 소비하고 결국 시민들의 일상적 삶은 소외된다.
불화의 도시를 넘어
작은 건축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하나의 삶이 모이고 연결되면서 도시의 삶이 된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혼자만의 배타적 시간을 갖고, 그런 ‘오늘’이 쌓이는 공간들이 모여 모두 함께 사는 도시가 만들어진다. 물론 현재의 도시는 R.H 토니가 말했듯이 “공동의 이해를 넘어 소유와 권력이 목적인, 관계가 끊어진, 공동의 목표가 없는” 불화의 도시일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와해된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을 통해 사적 사회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협력하는 도시를 만드는 일은 시급하다. 앞으로도 서울역과 용산역 같은 대규모 개발 계획은 추진되고, 작은 마을 공동체는 와해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가려지거나 쫓겨나겠지만,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기억을 공유하는 일은 지금 보다 많아져야 한다. 공공 장소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의 요구와 가치를 담는 일상적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화가 정착될 때 건축과 생활 세계와의 간극은 극복될 수 있다. 그래야 폭염 사회에서도 빈자와 노인을 위한 최적의 공공장소가 우리에게 도래할 것이다.
*메인 사진: 김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