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삶 너머의 확장된 가족을 위한 몇몇 시도들
더 행복한 공동체적인 삶
불과 40-50년 만에 한국의 주거 문화는 천지개벽에 가까운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집합주택의 거대한 확산’이라는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주거 생활양식은 물론 수백 년 동안 지켜져 왔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이웃은 물리적으로 더욱 가까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더욱 멀어졌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거나 어색한 일이 되었다. 개인과 개별 가족은 단자화하고 고립되어간다. 지역 공동체의 붕괴는 무엇을 의미할까? 공동체는 일종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가치를 갖는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인 사회적 공간과 네트워크는 직접적인 생산을 하지 않지만, 개인과 집단의 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공동체가 살아 있는 지역의 이점에 대해 로버트 D. 퍼트넘(Robert D. Putnam)은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연계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연계가 잘된 공동체 속에 사는 경우에는, 그 사회가 누리는 풍부한 혜택을 일정 부분 얻을 수 있다. 옆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시하는 이웃들 때문에 우리 동네의 범죄율이 낮다면,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돌아다니는 데 보내느라 집을 비우고 길에서 이웃을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아도 혜택은 같이 보는 셈이다.”
공동체가 살아 있는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관계 맺음으로 인해 경계가 느슨해진다. 그에 따라 더 많은 나눔, 보살핌, 슬픔과 기쁨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더 행복하고 심지어는 더 생산적이다. 공동체가 사라져 가는 오늘날 훨씬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쌓고 사는 현대 한국인들이 가난한 시절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2010년대부터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공유 주택(share house), 코하우징(cohousing), 협동조합주택 등의 새로운 주거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작은 몇몇 시도들이 보다 큰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시점에 그것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전쟁 뒤 서울은 10년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늘어났는데,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1950년에 150만 명 정도이던 인구가 1970년에 550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20년 뒤 1990년에 1,000만 명에 다다른다. 빠른 시간 내에 이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주택 공급 정책은 대규모 공동 주택인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급속도로 확장하는 도시에서 아파트는 삶의 공간으로서보다 욕망의 대상, 부의 축적 수단으로 더 큰 가치를 발휘했다. 단지 중심으로 발전한 한국의 아파트는 편리함과 재산 축적을 대가로 집단 이기주의와 주민 간의 갈등, 소통의 단절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삭막해지는 서울의 주거 문화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몇 가지 현상에서 비롯한다. 첫 번째는 1인 또는 2인 가족 비중의 급속한 증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1인 가구는 통계상으로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2017년에 1인 가구는 558만 3천 가구로 전체 가구 중 28.5%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2인 가구도 늘어나 2017년에 15.8%에 해당한다. 오늘날 한 사람 또는 두 사람만 사는 가구가 44%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전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47년에 1인 가구는 37.3%, 2인 가구는 21.5%로 늘어난다. 이런 추세는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이런 현상과 맞물려 빈집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9년 현재 서울에만 2940채, 전국적으로 140만 채가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한국인들에게 집 장만은 필생의 과제다. 하지만 가족의 해체는 소유하는 집에 대한 갈망을 약화시키고 있다. 1인 가구에게 집은 소유하기보다 사용하는 대상이다. 그에 따라 혼자 사는 오피스텔이 크게 증가했지만, 오피스텔은 그야말로 고립된 나 홀로의 공간이다.
함께 사는 집...통의동집, 팔판동집, 용두동집
이와 달리 공유 주택(share house)은 혼자 살면서 함께 사는 집을 지향한다. 2010년대부터 공유 주택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 규모는 아직 크진 않지만 가족 형태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정림건축문화재단(Junglim Foundation)이 2011년에 완공한 통의동집(Tongui-dong House), 공유 주택 브랜드 우주(Woozoo), 사이 건축(Architects Office SAAI)의 어쩌다집(Uhjjuhdah House)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존의 다세대주택이나 단독주택, 아파트를 개조하는 공유 주택과 달리 통의동집은 정림건축문화재단이 건축가 집단인 서울소셜스탠다드(Seoul Social Standard)와 협업해 가장 효율적으로 자원을 활용하고, 남남이 함께 사는 데 따르는 불편 요소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면밀하게 건물과 프로그램을 디자인한 사례다.
1인 가구가 주로 이용하는 오피스텔과 공유 주택을 비교하면 이렇다. 오피스텔은 침실과 주방, 욕실을 소유하면서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 소통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닫힌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도 모른다. 반면에 공유 주택은 자기가 가진 공간의 일부를 공유함으로써, 즉 일종의 희생을 통해 더 넓은 공간과 더 많은 물질을 누린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소통이 일어나고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준다. 통의동집의 경우 7명이 사는 데, 각자 10 제곱미터(3 평) 남짓한 공간을 내놓으면 약 30 제곱미터(10 평)의 공유 공간이 생기는 셈이다. 방은 3.5~4.5평으로 적절한 호텔 룸 사이즈다. 대신 10평이 넘는 큰 주방이 생긴다. 더 큰 주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친구들을 초대해서 즐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주방의 공유를 통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자기가 가진 음식과 물질을 나누기도 한다. 화장실과 욕실 세탁실도 공유 공간이다. 7명이 사는 집에서 욕실은 3개이고 화장실은 2개다. 우리보다 일찍 공유 주택이 발전한 일본에서 나온 데이터에 따르면 4명 당 하나의 욕실과 화장실이면 적절하다. 사실 오피스텔의 경우 각 방마다 화장실과 욕실이 있기 때문에 독립성은 보장되지만 그만큼 자기 공간이 줄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화장실과 욕실은 쓰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은 곳이다. 이런 기능적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오히려 생활공간에 더 많은 여유를 줄 수 있다. 여성들의 경우 화장실과 욕실의 공유에 대해 저항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방 공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존 타카라(John Thackara)의 <새로운 미래, 어떻게 번성할 것인가(How to Thrive in the Next Economy)>에 따르면, 인간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기보다는 협력하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앞으로 공유 경제는 필연적이며,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를 이길 것이라고 전망한다. 공유 주택의 입주자는 자기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스스로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원은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공유함으로써 덜 낭비된다.
일반 공유 주택과 차별화된 통의동집의 또 다른 점은 공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통의동집에는 정림건축문화재단 사무실이 1층 있는데, 이곳에서는 재단이 주관하는 포럼과 모임 등의 행사가 열리기도 하고, 입주자들에게 일종의 거실로서 이용되기도 한다. 사무실의 존재는 입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사무실은 입주자들이 없는 시간에도 운영이 되므로 택배를 다 받아준다. 1층에 있는 사무실은 늘 불이 켜져 있어서 어두운 골목에서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퇴근하고 어두운 밤에 집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마치 가족이 있는 집에 오는 것 같은 따뜻함을 준다. 물론 그들은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피스텔처럼 완벽하게 개별화한 존재가 아니다. 공유 주택의 거주자들은 소속감을 느낀다. 따라서 공유 주택은 꼭 사무실이 아니더라도 1층에서는 카페든 상점이든 상업공간이 있으면 입주민들을 더욱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다. 주거만 있는 공유 주택은 주로 밤에만 사용되므로 쓸쓸해지기 쉽다. 주거와 업무 상업 공간이 결합된 복합 공간의 존재는 입주자들에게 더 잦은 우연한 만남의 기회를 만들면서 서로 익숙해지게 하고 관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공유 주택은 공동체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그렇지는 않다. 공유 주택이 복원하려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성’이다. 과거의 지역 공동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지나칠 정도로 서로를 간섭한다. 오늘날 이런 푸념을 종종 듣는다.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도 알던 우리가 어쩌다 층간 소음으로 이웃을 죽이는 지경까지 왔을까?” 이는 끈끈한 지역 공동체 사회가 완벽한 남남의 사회, 심지어는 독존주의 사회로 변화한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변화다. 공유 주택의 사람들은 독립성이 보장된다. 과거 완고한 공동체 사회에서는 이웃을 참견하고 조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공유 주택에서는 소극적으로 참견하거나 간섭하는 편이다. 완벽한 남남이 아니다. 고립된 느낌이 없고 외롭지 않다.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물질을 나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기꺼이 돕는다. 이를 ‘느슨한 공동체’라고 한다. <나 홀로 볼링>의 저자 퍼트넘에 따르면, 느슨한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위기 상황이나 특별한 일이 생기면 나름대로 공동체성이 되살아난다. 단 그들 사이의 어느 정도 소통이 있어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 때라야 한다. 완고하고 끈끈한 공동체로 되돌아가진 않겠지만, 옆집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의 냉정한 사회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도시에서 옆집 사람이 아프다고 병원에 데려 가진 않지만, 느슨한 공동체에서는 기꺼이 그런 수고를 감당한다.
나눔과 함께 독립성의 보장도 공유 주택에서는 중요하다. 통의동집은 사적 공간과 공유 공간 사이에 범퍼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아무리 공유 주택이라고 하더라도 방에서 나왔는데, 바로 눈 앞에서 다른 입주자들이 파티를 하고 있으면 불편하다. 그래서 공유 공간과 사적 공간은 아예 다른 층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신발은 현관에 내놓지 않고 신발장에 넣는다든지, 세탁기는 몇 시 이후에는 돌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리고 같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만드는 규칙도 생긴다. 재미있는 건 과거의 끈끈한 공동체를 기대한 지나치게 적극적인 공동체형 인간이 먼저 공유 주택을 떠난다는 사실이다. 역시 현대인은 너무 가까운 것은 꺼리는 경향이 있다. 공유 주택 브랜드 우주는 그런 현대인의 성향을 고려해 공동의 관심사로 입주자를 모은다. 예비 창업자들을 위한 셰어하우스,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위한 셰어하우스, 이런 식이다.
1인 거주 공유 주택 외에 2인 이상 가족이 거주하는 협동조합주택 역시 201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성미산 마을의 ‘소행주’는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소행주는‘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공급자 중심의 주택이 아니라 입주가 디자인에 참여할 수 있는 수요자 중심의 주택이다. 입주자가 완벽하게 디자인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입주자마다 요구하는 다락, 오두막 형태의 베란다 등을 수용해 하나의 건물 속 집들은 단독주택처럼 각양각색이다. 가족들의 사는 다세대 공유 주택에서도 공유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소행주에는 커뮤니티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마을회관 같은 역할을 한다. 각 가정마다 1평 정도의 공간을 나눔으로써 마련된 공유 공간에서는 공동 육아와 공동 식사가 이뤄진다. 또한 각 가정마다 잘 쓰지 않은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 입주민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이 진행한 2인 이상 가족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공유 주택으로 2018년에 완공된 용두동집(Yongdu-dong House)이 있다. 용두동 집에서는 70대와 30-40대 부부들, 아이가 넷과 셋인 가정이 이 지역의 교회 사무실, 동네 극장과 동네 책방이 공간을 함께 쓴다. 이들은 주방과 세탁실 작은 서재를 공유한다. 가족들의 공유 주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 육아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빨리 공유 개념에 적응한다. 서로 다른 집에서 편안하게 노는 것을 넘어 잠까지 잘 정도다. 어른들은 다른 집 아이를 보살피는 일에 기꺼이 나선다. 공유 주택은 아이들에게는 진정한 공동체다. 가족형 공유 주택에서는 주민들 외에 주민들과 관계 맺는 사람들, 주변 어린이집 아이들과도 소통과 나눔이 이루어진다. 이 집의 또 다른 목표는 다양한 지역민들이 모일 수 있는 지역 허브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입주민 중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는데, 그가 가르치는 외국인 학생들은 공유 공간인 주방이나 동네 책방에 와서 공부를 하고 밥을 먹는다. 주변 어린이집이 문 닫을 시간까지 부모가 퇴근하지 않은 아이가 있다면, 어린이집 선생이 아이를 용두동집에 데려온다. 그러면 이곳에 사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입주민의 지인들, 지역의 주민들과 관계가 맺어지면 공유 공간의 활용도가 높아진다. 이런 현상은 뜻밖에도 입주민들의 만족도를 높인다.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밥이 없어 이웃에게 부탁하면 밥은 물론 반찬까지 준다.
세계의 그 어느 도시보다 서울은 집이 소유와 부동산 가치로 각광받고 있다. 집을 경쟁적으로 소유하고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태도가 엄청난 지역 이기주의를 만들었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오늘날 공유 주택과 공동체성의 복원은 실험이 아니라 설득력 있고 가능성 높은 대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