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을 퀴어링 01]
※ 본 글은 픽션이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단체, 배경 등은 모두 실제와는 어떠한 관련도 없는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 안녕하세요, 라디오 진행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게 된 이수완입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에 이런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저는 올해 서른일곱 살인데요. 뭐,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선 또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닌 것 같아요, 그렇죠? (웃음) 음, 그런데 이십 년쯤 전의 저는, 제가 서른 살을 넘겨서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숨 고르기.
― 어머니, 아버지. 저는 어떤… 행세를 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돈이 없다거나, 아, 벌이가 시원찮은 건 맞아요. 마땅한 사람이 없다거나, 음, 그것도 아닌 건 아닌데. 아무튼 그리하여 이러고 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저를 이렇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셨으니 받아들이시는 것도 두 분이 기꺼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온 세상이 조용하다.
― 십대와 이십대를 지나 무사히 삼십대 후반이 된 사람으로서, 각자의 싸움을 막 시작했거나 한창 진행 중일 어리고 젊은 퀴어들에게 응원과 연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새해엔 제 친구들이, 느슨하나게나마 저의 울타리가 되어준 퀴어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조금 덜 울고 조금 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그간 미약하게라도 힘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좀 더 힘이 되도록 해볼게요.
목이 메인다.
― 감사합니다.
*
수완은 자신의 키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용을 써도 달라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덤덤한 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 이사 온 동네의 지하철역을 이용하다 갑자기 열차 도착 안내 전광판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역의 층고가 다른 곳보다 훨씬 낮아보여서, 키가 크지 않은 그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간대에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지만, 정말 그럴 용기를 내려면 술에 진탕 취해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겁내는 것도 용기내는 것도 제대로 못해. 그래서 미뤄두고 모른척 해온 모든 일들이 티끌 모아 태산이 되어 몰려오는 판국이었다. 이수완 작가님, 장편은 언제 내시나요? 아하하, 저 이 나라의 레이먼드 카버가 되어보겠습니다. 그럼 지금 경제적으로 굉장히 궁핍한 상황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어떻게 아셨죠? 원고료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런 악몽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는 새벽을 수십 번은 족히 맞이했다.
수완은 몇 년전 한 출판사의 신인 문학상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소재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지만 영화적인 마력을 가진 짧은 소설 한 편으로 그는 제법 인지도를 얻었다. 게다가 그가 오래 전부터 영화 팟캐스트를 홀로 운영해왔고(핸드폰으로 녹음한 조악한 음질과 함께), 입 털기 좋은 이것저것에 조예가 상당히 깊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작가 이수완에게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굳이 책을 통해 얻고 싶어하지는 않아서, 수완 본인도 나름대로 여러 방도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괜찮은 단편을 몇 편 더 써내며 젊은 신인 작가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의 글 중 하나는 웹드라마로 영상화되었다. 영화관에서 GV 패널 참여도 몇 번 했다. 왜인지 그에게 호의적인 방송사의 토크쇼에 다른 출연자 땜빵으로 몇 번 나가기도 했다. 있어보이는 말을 물 흐르듯 얄밉지 않게 풀어놓는 모습에, 사람들도 수완도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마침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일시적으로 자리를 비웠다. 며칠간 스페셜 DJ로 출근한 수완은 기다렸다는 듯이 청취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연스레 다음 개편에서 물망에 올랐고, 곧 심야 라디오 진행을 맡게 되었다. 새로 개봉하는 영화며 막 출간된 책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의 말 몇 마디에 책 판매 순위가 바뀌고 예술 영화관이 북적였다.
그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고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 고민상담 코너를 통해 청취자들과의 소통을 이어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출난 것 없는 구성의 프로그램이었건만 컬트적인 인기가 있어 청취율이 곧잘 나왔다. 수완은 다가오는 기회들을 용케 제것으로 만들어냈다. 여러 해를 들여 차근차근.
정말? 아닐걸. 이쯤이면 장편을 낼 연차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 그는 적으나마 당장 고료가 들어오는 단편 청탁이 절실했고(그의 자존심이 글쓰기 자체를 놓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라디오 DJ는 보기보다 업무량이 많았으며(그가 모든 코너를 너무 세세히 준비해가기 때문일지도), 강연이나 출판사 유튜브 등에서 오는 제의도 시간만 되면 거의 다 수락하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쓰려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래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내려면 벌어놓은 돈이 좀 있어야 하고, 이 업계에서 재산을 축적하려면 장편 단행본이 잘 팔려야 하는데 그런 걸 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시간이 있다고 해서 그런 베스트셀러를 무조건 써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무슨 자기 꼬리 먹는 뱀마냥… 어쨌든 딴짓을 너무 많이 하는 건 맞지. 먹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무겁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수완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
『야 축하한다 (파티하는 얼굴 이모티콘)』
『고마엉』
메시지가 왔고, 수완은 조금 귀찮은 기분이었지만 일단 답을 보냈다.
『수상 소감을 꼭 준비해온 것처럼 하시더만』
오래 전부터 계획해온 거라 그랬지. 수완은 괜히 입을 비죽였다. 목이 말랐다.
『끝나고 뒤풀이 갔나』
『어 라디오 쪽은 술 별로 안 먹더라』
나는 좀 마셨지만. 사람들 반응은 어땠어, 묻는 말에 그는 지난 밤을 떠올려 보았다. 대부분은 웃는 얼굴로 수완을 맞아주었는데, 그게 호의에서 비롯되었는지는 그도 가늠할 수 없었다. 웃고 넘기기, 아무 일 없던 척하기. 지겹게 겪어온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A씨가 소감 멋지다고 하긴 했어 지나가는 말이엇겠지만』
『헉 그 프리 선언한 아나운서?? 밈에 절여진 커뮤니티충인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모님은 뭐라하셔』
『뭘』
『너가 상을 받앗자나』
흐음.
『티비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들어서 모를걸』
『엥 (어이없는 표정의 이모티콘)』
『정치 유튜브만 들입다 보는데 뭐 딱히…』
『혹시 너 등단한 건』
『모를걸』
『(깜짝 놀란 표정의 이모티콘)』
소설 읽는 사람들도 적은 시대인데다 책날개에 사진을 싣지 않았더니 정말 아무도 모르더군. 지인 제보조차 못 받았나봐. 필명을 쓸까 고민할 필요조차 없더라. 그냥 회사 쭉 다니는 줄 알아. 안 믿긴다구? 나도 안 믿긴다. 말 안 하면 아마 망상조차 못 해보는 카테고리의 일인가 봐. 물론 그 덕분에 이 정도로 안전하게 지내는 걸지도.
『알아도 말 안 했을 거 같긴 해 앗 역시 이쪽이 말이 되나』
소설들의 소재가, 내용이, 너도 알다시피. 그쪽에서 먼저 알아버렸다면 별 수 없지만, 먼저 말은 안 하지… 절대로. 수완은 친구와의 대화를 끝맺고 싶었다. 피곤했다. 그리고 할 일이 있었다. 시상식이었던 어제는 미리 작업해둔 녹음본을 송출했지만 오늘은 다시 숨가쁜 온에어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다. 진행 일을 맡은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매일이 설레고 두려웠다. 눈꼽만큼의 책도 잡히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나 매번 의심하면서도.
『너 점심 시간 끝나지 않았냐』
『아 맞다 팀장이 오랬는데』
『ㅋㅋㅋㅋㅋㅋ 일하러 가라』
『나중에 기주랑 무영이랑 해서 술 먹자』
『조아용』
친구가 사라진 뒤 수완은 오늘 방송에서 이야기할 것들을 주욱 써내려갔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청취자들과 만날천날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던 시간으로, 곧장 돌아가기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작가 이수완 공식 계정이 있는 인스타그램 어플은 아까 지워버렸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게시글 댓글을 다 닫았더니 다이렉트 메시지가 끝도 없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씹스러운 말들을 누구께서 보내셨을까? 당연히 똘추 혐오자 씹새끼님들께서요.
잠잠해지면 다시 깔지, 뭐. 누군가가 좋은 말을 보냈을 수도 있지만 전체에서의 비율은 얼마 안 될 것이다. 선의는 자그마하고 악의는 부지런하구나. 역시 인스타그램에 인간사가 압축되어 담겨있단 말이야. 그는 고개를 젓고는 흉물스러운 아이콘을 눌러 트위터에 들어갔다.
트위터에서는 공식계정을 운영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수완인 것을 아는 지인들이 몇 있긴 했다. 알리려고 한 적은 없으나 전부터 얼굴 보고 지내던 사이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입이 가벼운 사람들도 아니고 수완도 트위터에서는 리트윗이나 하고 말이 많지 않으니 별 일 없을 거라 여겼다.
『헉 이솬 머임』
『누군데』
『소설가』
『소설가가 왜』
『어제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커밍아웃함』
『(헤드뱅잉하는 고양이 GIF)』
『(무지개 깃발을 흔드는 엘리엇 페이지 GIF)』
나쁘지 않네. 스크롤을 좀 내려볼까.
『라디오에서 퀴이영화 얘기할 때마다 목소리 톤 완전 바뀌는데 모를 수가 잇냐고』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생방송에서 말할 줄은 몰랏지』
『근데 이스완 쓴 거 읽어보면 약간,, 숨기는 거 싫어하는 성격 같아서』
저를 간파하셨군요. 에고서치 이거 재미있네.
『이수완 계이 전에 맞팔이었는데 나 안 데려갓음 ㅋㅋㅋ』
누구지… 수완은 머리를 긁적였다. 몇 번씩 계정 이동을 하다보면 의도치 않게 사이버 친구를 잃곤 했다.
『근데 뭐라고 커밍아웃해쓴ㄴ데?』
『몰라』
『계이 전 계정에선 논바랫음』
『그게 먼데』
『핑프세요????』
갈 길이 멀구만. 수완은 트위터 어플을 껐다. 일이나 하자… 그래! 그러려면 커피가 필요하지. 그는 배달 어플에서 근처 카페 배달 메뉴를 한참 구경하다가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앞으로 일이 끊기면 끊겼지 더 들어올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돈을 아낍시다. 스틱 커피나 드세요.
공책을 펼쳐두고 볼펜을 빙빙 돌리면서 수완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늘은… 하필이면 고민상담 코너가 있구나. 얼마 전 사연 하나를 소개했다가 그 새벽 시간에 실시간 댓글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던 기억이 났다. 같은 아이돌 그룹을 덕질하다 만난 애인과 헤어졌는데, 가수를 보러 가면 왠지 구 애인을 만날 거 같아서 음악방송 스케줄에 갈지 말지 고민이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그룹을 좋아한 걸 보면 동성 커플이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난무하던 댓글. 에이, 동성은 뭐고 이성은 뭐란 말이야.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지. 어제 저질러놓은 일이 있으니 무난한 것으로 골라볼까. 그런데 왜 라디오 작가님은 아직 연락이 없고…
수완은 문득 오늘 식사를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자꾸 배에서 소리가 나더라. 뭐 먹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 반복하던 그는 밖에 나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식당에서 먹기 좀 그런데. 나 이거 자의식 과잉 아냐? 아무도 못 알아볼 수도 있어. 아, 마스크 쓰고 가서 뭐라도 포장해오면 문제 없지. 운동할 겸 동네도 한 바퀴 돌고. 역시 나야.
그는 롱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둘둘 매고 마스크에 모자까지 쓴 채 집을 나섰다. 햇볕이 나는 게 무색할 만큼 공기가 차가웠다. 미세먼지 농도는 괜찮던데. 수완은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폐 끝까지 쿡쿡 찔리는 기분을 느끼고 나니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라디오 잘리면 일단 인스타에 디엠으로 욕 보낸 새끼들 다 고소해 버리고… 합의금 뜯어내서 먹고 살아야지. 당연한 얘기지만 돈 받기 전에 내가 자살할 수도 있긴 해. 그래도 순순히 죽어줄 순 없으니까, 어디다 불이라도 지르고 죽어야겠다.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기엔 내가 그렇게 유명인도 아니고. 개명하고 취직하면 굶어죽지는 않지 않을까? 안경테 바꾸면 다들 못 알아볼 거 같은데.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뭘 떠올리는 게 아냐. 무슨 연기 피어 오르듯 망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머리가 맑은데(숙취가 좀 있지만) 걷는 행위 하나에도 집중을 못하고.
그런데 뭐 먹지. 공터를 몇 바퀴 빙빙 돌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막차 타고 하는 출근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라디오 하는 시간이 원래 인간이 꼭 수면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라던데. 뭐, 당장은 안 잘리겠지, 봄 개편에 결판이 나려나… 기요틴 배달 기다리면서 목 씻고 기다리는 느낌이 이런 건가. 이게 다 차별금지법이 없어서 그래.
음식점 앞을 지나가는데 안쪽 벽의 커다란 빔 화면이 보였다. 힐끔 보니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소감을 인터뷰하는 내용인 듯 했다. 해가 바뀌어도 뭐 새로울 게 있나. 좋았던 적도 없는데 좋은 시절이 다 간 기분이야.
글만 써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면 이런 저런 고민이 덜 할까. 그런데 그게 가능하면 내가 이수완이 아니고 하루키인 거니까. 나름 노력은 했지만... 원고 청탁이 자주 들어오지도 않고, 요새는 영상화 할 만한 이야기나 좀 팔리니까 뭘 위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어. 이번 ‘터널’은 또 얼마나 길까. 내가 자초했지만 말이야. 여기저기 헤매는 걸음이 무거웠다.
십여 년 전 대학에 다닐 때 생각이 났다. 그때도 수완은 멋대로 흐르는 시간을 혹독하게 겪어내고 있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은 없지만 그 시기의 기분만큼은 남아서 신발 속 모래알처럼 까끌거렸다. 그 터널은 다 지나온 게 맞아. 그 다음 몇 년은 정말로 꽤 괜찮았잖아. 겉으로는 그럭저럭 모범생,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직장. 주변 사람들 속 한 번 끓이지 않고 무던하고 평범하게 지내온 시간들이 역겨웠다. 내 자리가 아닌 곳을 너무 오래 지켰다. 오직 다른 이들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래서 속이 썩고 타들어갔다.
내가 성급했을까? 그러나 구십 살 먹어서 얘기했어도 누군가는 국민 정서상, 사회적 합의가 아직 부족, 이런 소리를 지껄였을 거라서. 생방송에서 말하지 않으면 편집될 게 뻔해, 이게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야? 세상이 살 만해지기 전에 지구(의 인류)가 멸망하겠지. 당장 누군가가 내게 돌을 던지고 칼부림을 하는 건 아니지만(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이미 많이 있고 난 비교적 운이 좋다는 것도 알아), 애 써서 허름한 울타리라도 간신히 마련해뒀다 자부했던 게… 조금만 바람이 불면 휩쓸려가는 느낌이야. 숨어야 해. 도서관 서가 깊숙한 곳에, 불 꺼진 영화관 좌석 깊숙한 곳에.
나를 도와주고 지켜주는 건 이야기뿐이야. 그걸 만들려고 글을 쓰잖아. 나 자신으로 살려고.
때때로 사치를 해. 폰 케이스는 하나면 충분한데 세 개나 가지고 있지. 뒷면에 카드 끼는 거, 스트랩 달린 거, 오로라 색인 거… 미스트는 네 개나 있어. 1+1에 만원이길래 미리 두 세트 사뒀거든. 이게 다 외로워서 그래. 왜 외로운데?
안전하지 않아서.
*
수완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마음은 만신창이인데 몸은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속에 밀어넣고 있자니 자신이 우습고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깐 뭐 카누나 먹겠다더니 어떻게든 돈을 써요… 그래도 큰 소리로 웃거나 울지 않았으니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옆 테이블에 있기는 한데 이걸 같이 밥 먹는 거라고 볼 수 있나? 대충 그렇다 쳐. 막차 타고 출근하고 첫 차 타고 퇴근하는 사람이다 보니 친구들을 자주 만나기 어렵고… 그러고 보니 아까 축하한다고 연락 준 애한테 일이나 하라고 말한 거 좀 그렇네. 이따 다시 말 걸어봐야지.
회사에 다닐 때 영화학교 시험을 준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 해 연속으로 지원한 모든 학교에서 떨어지고 포기했는데, 사실은 직장에 다니기 싫어서 시험을 친 게 맞았다. 붙는다고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줄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닌데, 딱히 공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떨어졌겠지만! 그래도 준비 학원에 회사 퇴근하고 들르고 주말마다 출석하면서 들었던 수업은 재미있었다. 다 지나고 나니까 좋았던 것 같다. 배운 게 글쓰는 데 도움도 되고.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해도.
― 수완 작가님, 오늘 출근하시죠?
헉, 딴 생각 하다가 잘못 눌렀다. 전화 받아버렸다.
― 네네!
― 오늘 코너 정리가 좀 됐을까요?
― 앗, 아뇨! 얼른 할게요! 제가 방금 전에 일어나 가지구, 밥을 먹고 있어서, 으악…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그, 고생하셨어요.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의 따스함이 생경했다. 맞아? 이게 맞아? 이런 위로를 듣는 사람이 나일 수 있어?
― 연말이고 해서 하시고 싶은 얘기 있으시면 편하신 대로 진행하세요. 요일별 코너에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물론 그대로 하셔도 되고요.
― 네… 송 작가님 항상 감사해요.
― 에이, 이따 뵈어요!
개편 때 잘릴 예정이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거 아냐?
수완은 고개를 젓고는 커피를 남김없이 마셨다. 못 울었지만, 할 일을 하자.
*
나도 내 몸이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 이제 막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¹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하든 다른 보통의 사람들 방식으로 재단당할 걸 알아. 그래서 점점 조금씩 포기하는 거야. 농담으로도 꿈을 꾸지 않고, 그냥 버티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 그나마 운이 좋았던 덕택에 아직 살아있으니, 그 얄팍한 운마저도 가지지 못했던 이들에게 빚을 진 기분.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
너는 내가 뭐 같아? 여자애를 좋아하는 남자애? 여자애를 좋아하는 여자애? 남자애를 좋아하는 여자애? 남자애를 좋아하는 남자애? 한때 좋아했던 사람들을 지금은 끔찍히도 싫어하게 된 이도 저도 아닌 애?
이도 저도 아닌 거 맞지, 그냥 어딘가에 끌려들어갈 뿐이잖아. 그래서 다들 한 방 맞고 정신 차릴 사건이 필요해. 말보다 행동을 앞세워서, 트럭을 몰고 거리를 질주하며 사람들을 치고 다니면 알아줄까.² 모두가 인정하는 악인들을 잡아다 목을 매달고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면 내 이름을 기억할까? 아니면 정말 기를 쓰고 노력해서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진 다음 ‘선언’이란 걸 하면? 그게 끝인가? 그 다음의 내 삶은 어떻게 되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지? 심지어 나 자신도 ‘바로잡을’ 기회 한 번을 잡지 못하고 쓸려갈 게 뻔하다고.
― 가람아, 수완이 원래 사람이 좀 상태가 이렇게, 좀 그러냐? 취해서 저러는 거지?
― 나 안 취했어어.
― 저거 저거 내일이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
바쁘다고 우리 자주 만나지도 않으면서. 바쁨과 안 바쁨의 불연속적인 면이 프리랜서 인생이 가진 재미있는 점이긴 하죠. 뭔 소리야. 후리란사! 개인사업자! 특수고용노동자! 사회 안전망 부재! 누구 수완이 뒷목 쳐서 재우실 분. 나도 월급이 코딱지라 부업을 해야 하나 고민된다. 나랑 유튜브할래? 야, 동네에 개인 카페가 있는데 어느 날부터 하이볼을 팔더라? 궁금해서 가서 시켜봤는데 의외로 맛이 제대로인 거야. 그때 생각했지, 다들 허투루 사는 게 아니야.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 힘껏 힘을 내고 있단 말이야. 어어, 내 말 듣고 있어?
― 나는 이모야? 삼촌이야?
― 제주도에서는 다 똑같이 삼춘이라고 한대.
― 좋은 곳이네. 가서 살까 봐.
― 그 발언 약간 좀 서울공화국.
― 그럼 어떡해, 외국 갈까?
― 타자화의 비극.
─ 당장 비행기 표 살 돈은 있냐고요.
─ 저가 항공 타면 되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멋대로 낭만을 부과하기. 근데 뭐 부딪쳐봐야 자기 거 되니까. 아니, 이제 그만 좀 들이받으면 안 돼? 난 스무스하게 살고 싶다고. 그거 의미가 부들+폭신한 쪽이야, 미꾸라지st야? 알 바야?
─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aㅂ니다.
─ 네가 애 같은 건 저도 아는 biㅂ니다.
─ 그건 좀 에이엄 혐오인 듯.
우리가 혐오와 차별의 속도로 가속노화하는 중이라면? 곱게 나이 먹고 미중년 되기는 틀린 거지. 너 잡지 인터뷰는 괜찮게 나왔더만. 그거 다 메이크업이랑 포토샵이야. 어쩜, 세상에 진실된 게 하나도 없구나. 그래도 선크림은 챙겨 바르도록.
─ 인터뷰는 어땠어?
─ 사이트에 전문 있으니까 봐.
『이수완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요? 어… 저는 단단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어디서 들은 말 하나를 며칠씩 곱씹고 상처 받을 때도 있어요. 소심하죠, 겁 많고.』
『그래도 본인 소설에 대한 평은 찾아보시죠?』
『네, 맞아요. 종종 검색해서 봅니다.』
『마음에 드는 평이 있으셨다면?』
『’작가가 숨기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 것 같다’요.』
『그 평이 왜 마음에 드셨어요?』
『저는 겁이 정말 많아서, 다 숨기고 모른 척하며 살아왔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싫어하는 일을 몇 년이고 계속 해온 셈인데요. 그걸 일깨워주는 말이라 좋았어요. 저를 알아봐주고, 제가 할 일이 무엇이다 하고 알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겁이 많다고 두 번이나 얘기하셨는데요. 사실 오늘 인터뷰를 앞두고 작가님 글을, 전부는 아니어도 몇 편 읽어봤습니다. 저는 작가님 글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용기 있고 당차다고 느꼈는데, 방금 전 주신 이런 답변과 연관이 있는지요.』
『글을 쓰려고 하면… 저는 제 일부분을 떼어내 등장인물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제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조금씩은 저예요. 그런데 많은 부분이, 사실 거의 모든 부분이 지금의 저에게서는 비롯되지 않은 것들이에요. 제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작가님의 창작의 비결을 엿본 듯한데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저를 전업작가로 먹고 살게 해줄 작품? (웃음) 단편만 계속 써왔기에 아쉬움이 있어요. 장편 소설을 구상 중인데 잘 되지는 않네요. 쓸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요.』
『전업 작가라 하시면, 지금처럼 다방면에서 활동하시는 걸 앞으로 지양하신다는 말씀이실까요?』
『아마도요… 즐겁게 일하고 있지만, 운 좋게도 다들 저를 좋게 봐주시고 애정을 나눠주셔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지만, 제가 잘하고 있나 항상 의심스러워요. 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나 하고. 정말 어려워요, 뭐 하나 똑부러지게 결정하기가. 제가 전업 작가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맞아요. 따지고 보면 규칙적으로 매일매일 라디오 출근하고, 스케줄표 짜서 강연이나 방송 일을 꾸준히 하면서 일상을 꾸려가는 게, 내버려두면 혼자 굴 파고 들어가 숨는 저 같은 인간에겐 도움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은 하는데… 되게 미련 많은 사람 같네요. 욕심 많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죠, 하나하나씩.』
『마지막으로 새해의 목표를 말씀해주신다면?』
『단단한 사람 되기.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글 쓰기. 음, 또 뭐가 있을까요? 선생님과 인터뷰 또 하기?』
─ 이거 인터뷰 언제 한 거야?
─ 수완이 나온 잡지가 1월호니까 인터뷰 자체는 11월 중순? 12월 초?
─ 근데 내용이 아주 그냥 벌써부터… 우리 수완이 속에는 불이 있어요.
─ 나 사주에는 불 없어.
─ 어디서 봤는데? 용한 데면 알려줘.
─ 무료 사주 앱.
내 안에는 정돈되지 않은 생각이 참 많구나. 만사에 양가감정을 가지고 이것저것 재는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역시 있어보이게, 생방송에서 다 말해버리고 시원하게 잘려야겠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땐 ‘저는 퀴어입니다’가 아니라 ‘엄마 아빠 님들이 절 이렇게 낳아놨으니 책임져’처럼 들리는 말만 주절거렸다. 더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을까? 그렇지만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말하는 것 자체가, 내가 그럴 수 있는 위치 비슷한 데에 있었던 사실 자체가 누구에겐 기만이 아닐까? 나는 너무 내 안위만 걱정하는 것 같아. 그건 맞지. 그런데 그게 들킬까봐 무서워하는 주제에 또 겁낸다는 것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 울지 말고 집 가서 자.
─ 커튼 치고 안대 차고.
─ 저번에 고민하던 암막 커튼 샀어?
─ 지금 거의 아침인데 니들 출근은 어떡해?
─ 오늘 일요일이야. 너만 이따 출근하지.
─ 시간 보면 수완이도 월요일 근무이긴 해.
그런데 너는 좀 걱정이 지나치게 많아, 친구야. 할 건 다 하면서 말만 안 했다 싶은 톱스타 연예인들도 잘만 살아, 자의식과잉 예방하자! 맞아, 너는 목소리만 유명하잖아. 새끼가 이걸 위로라고 하는 건지. 부모님은 연락 없으시고? 어, 그래서 더 좀 그래. 폭풍전야구나. 이게 예언인지 주문인지. 친구들은 수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애초에 그가 사는 동네에서 만났기에 오 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다. 그는 건물 현관에서 서서 돌아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등이 새벽 볕을 기꺼이 받아내더니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걸 끝까지 응시했다.
*
사고 비슷한 것을 쳐놓고 며칠을 끙끙대는 걸 친구들이 알고 라디오 제작진들이 아니, 틀림없이 청취자들도 다 느꼈겠다 싶었다. 우리는 전과 같지 않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요, 여러분! 프로그램 게시판이 엉망진창이 된 와중에도 그를 배려하고 어떻게든 보조하는 제작진도, 그가 또 다른 사고를(살자 리버스라는 것이 있다) 치지 않을까 돌아가며 꾸준히 연락 넣는 친구들도 이번을 계기로 깨달았을 것이다. 이거 우리들이니까 이만큼 신경 써주는 거지, 근데 또 하라고 하면 못 한다, 세상에는 지속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은 법이다, 하고.
그렇지만… 그럴 거면… 계속 주지 못할 다정함을 처음부터 왜 주는 건데? 인간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전 회사에서 같은 팀 사람들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사생활을 궁금해하고 주말 스케줄을 지독하게 캐묻곤 했어. 그래서 나는 진저리를 치다가 종국엔 정신승리를 하기 시작했지. 내가 나름 매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친해지고 싶은가봐,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내 모든 걸 궁금해할 리가 없잖아. 내가 불편하다고 끝없이 (비언어적으로) 표현했는데도 말이야. 그런데 퇴사하니까 이건 뭐, 경조사는 커녕 새해 인사 한 번을 안 하는데 대체 왜 그랬던 거지? 아니, 그 사람들과 다시 연락하고 싶다는 뜻은 아냐. 하지만 좀 웃기잖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은 회사 같은 팀에 있는 사람과는 그 정도로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본인들도 썩 내키지는 않지만 친히 저와 놀아주신 걸까요? 저조차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됐다, 일단 좀 자고 씻고 카페 가서 일하자. 수완은 핸드폰을 켜서 트위터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시상식 이후 매일같이 질질 짜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그에게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이수완 책 도서관에 있더라』
『재밋음??』
『아직 안 읽었어』
희망 도서 많이 신청해주세요…
『근데 이수완 남자논바야 여자논바야?』
『어쩐지 중성적인 매력이 있더라』
씨발.
『상 받더니 라디오 텐션이 죽었던데』
『초심 잃은 건가』
아니, 그게 아니고 전 고용불안정에 떨고 있는 거예요…
수완은 침대에 누웠다. 네 시간 반 뒤로 알람을 맞춘 그는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고, 정말로 시간에 맞춰 눈을 떴다. 씻고 가방을 챙겨서 방송국 앞 카페에 도착해 종종 앉는 창가 바 자리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이런저런 연락을 쳐내면서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씩 정리해야지, 나쁘지 않군, 부업이 본업을 침해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새해에 정말 괜찮은 장편 소설을 써서 단행본을 낼 거라고.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다가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카페 유리창 앞 주차장에 승용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었다. 빈 자리가 없는지 건물 뒤까지 보고 다시 돌아나온 차를 보고 수완이 혀를 끌끌 찼다.
으이구, 차를 이 혼잡한 동네에 왜 끌고 와서… 그리고 여긴 드라이브스루도 있는데.
승용차는 다른 주차된 차들 앞에 서더니 시동을 멈췄다.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주차할 요량인 듯 했다.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다 열리고 누가 내렸지만, 거리가 상당해서 수완의 자리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카페 입구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에 헉 저래도 되나, 사장님 보셨나요,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몇 시에 방송국 구내식당에 가야 사람이 없을지 고민하는 것이, 누군지 모를 매너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보다 그에겐 더 중요했다(그리고 이렇게 목 좋은 데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주차 도둑 정도는 신경도 안 쓸 것이다) . 요 며칠 커피와 술만 부어대서 그는 제대로 된 식사가 간절했다.
석식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되자 수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좀 제대로 해야지, 힘 내서. 방송국 사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이유 모를 홀가분함을 느꼈다. 나는 운이 좋았어. 공모전으로 등단하고, 예상치 못하게 좋은 관심도 많이 받았지.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느니 멋지게 퇴장하는 게 낫다 싶어 되는 대로 질러버렸고, 내 발로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노후로 걸어 들어가는 중. 괜찮아, 나쁘지 않아. 그럭저럭 괜찮아.
─ 수완아.
아,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는 꽤 괜찮았는데.
─ 너네 집 갔었는데 이사 갔다더라.
─ 왜 너는 이사한단 말도 없이 집을 옮기고 그러냐?
─ 연예대상은 또 뭐고?
─ 부모에게 숨기는 게 왜 이렇게 많아?
아침마다 조깅하겠다던 새해의 약속은 잊은 지 오래, 지금은 한 해의 끝. 달리기 운동 좀 미리 해둘걸. 수완은 일층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부모를 보고는 크로스백의 스트랩을 움켜쥐었다. 익숙한 옷 색깔. 카페에 주차만 하고 커피는 안 사고 사라진 진상. 왜 하필 오늘, 왜 이 시간이야.
─ 전화는 생전 안 하고, 카톡은 뭘 물어봐도 이모티콘이나 보내고. 그리고 너 책 냈다는 게 무슨 말이야?
─ 방송국에 취직했으면 말을 해야지. 유튜브에도 나오더라, 너.
돌겠네.
─ 얘기 좀 하자.
─ 일해야 해요. 지금 출근한 거예요.
─ 그럼 퇴근이 몇 시니? 기다릴게.
─ 퇴근이 문제가 아니에요.
다 아시면서 왜 매번 부정하세요. 왜 없던 일인 척, 모르는 일인 척 하세요. 왜 사람 힘빠지게 항상 고장난 레코드처럼 구시는 거예요. 왜, 왜요. 저는 돈 없고 마땅한 ‘이성’이 없어서 비혼하기로 결심한 ‘멀쩡한’ 젊은이, 그런 행세 더는 안 한다고요. 그 좋아하시는 유튜브에서 4k 화질로 확인하실 수도 있어요. 방송사에서 편집도 안 하고 올려뒀던데요? 친척들, 친구분들에게 제가 부끄러우세요? 그러니까 저를 아는 척 안 하시면 돼요. 부탁 드려요, 제가 간신히 쌓아놓은 제 것들을 놔두세요. 수완이 소리를 질렀다.
─ 병원도 못 가셨는데 진행까지 그대로 하시고… 오늘 진짜 고생하셨어요.
─ 아니에요, 소란 피웠는데 잘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술 터진 건 뭐, 별 거 아니잖아요. 경찰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완은 제작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부모에게 몇 대 얻어맞고 피도 봤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 생각해왔기에 타격은 별로 크지 않았다. 장소가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하는 방송국 로비인 것도 괜찮았다. 기왕 시작한 거 망신살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 조금 가만히 있으면 이따 진행할 수 있어요. 사건 직후 그가 꺼낸 말에 제작진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폭행 피해 기사 나갈 거라 무리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 청취자분들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분들 아닙니다. 아뇨, 개편 전까지 회차 얼마 안 남았는데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아아, 네. 송 작가, 뭐가 ‘아아, 네’야. 어이쿠, 진짜였군요. 이수완 잘린다(감사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온에어 불이 켜지자 수완은 최근 들어 가장 신난 목소리로 멘트를 열심히 쳤다. 그는 개운한 얼굴을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했다.
*
─ 그리하여 ○월 ○일이 마지막 방송이에요.
─ 원하시는 대로 일이 풀렸네요.
─ 원했다기 보다는… 에이, 모르겠어요. 지면에는 적당히 써주세요. 피디님과 작가님들이 많이 고생하셨더라구요. 처음에 저한테 진행 맡기는 것도 위에서는 반대했다던데. 연말에 제가… 그러고 나서 게시판이 불타고 있으니 뭐. 죄송한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방법은 모릅니다만.
─ 보답을 하신다면 역시 작품으로?
─ 이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뒤 자숙하다 복귀하는 사람의 인터뷰인가요. 아, 국민 정서상 맞나…
─ 작가님한테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고생하셨습니다. 작년 연말 인터뷰 때 뵙고 따뜻한 계절에 다시 뵙는 거라, 반 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인데 말이에요.
─ 사실 한 가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그 한 가지 일에서 시작된 건 맞죠.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퇴근하면 술 퍼먹고 출근 전엔 목구멍에 커피 붓고… 집에서는 드러누워 트위터에서 씨발놈들 계정 블락이나 하면서 지냈습니다.
─ 어, 약간 비약인가 생각은 드는데…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거든요.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은 적 있는 어떤 나라 이야기였는데, 그 나라는 원래 긴 역사 내내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도, 혼인하는 당사자들의 성별이 중요하지도 않았던 곳이었대요. 그런데 침략으로 인해 외부의 퀴어배제적인 문화가 들어왔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도 그 기준을 따르게 된…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퀴어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있고요. 그 나라의 상황을 보고 다른 국가들이 인권침해라고 비난하는데, 자신들의 과거, 자신들이 퍼뜨려놓은 것들, 이런 것에 대한 반성은 전혀 하지 않는 거예요. 보고 있으려니까 화가 무진장 나서… 저는, 뭐 상황이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감옥에 갇히고 사형 당하지는 않는단 걸 아니까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잖아요. 살아남는 것, 살아있는 것, 살아가는 것, 그 경로에서 개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나 행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지내요.
─ 말씀하신 내용이 준비 중이신 장편소설과 연관이 있을까요?
─ 다음달에 관련해서 쓴 단편이 나올 예정이라 바로 장편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 논의 중인 것도 있고요.
멀찍이, 내가 느꼈던 감정들에게서 한참 떨어져서, 낯설어질 때쯤 다시 꺼내 벼려내서, 더 제대로 더 정확히 쓸 겁니다. 수완은 뒷말을 삼켰다. 조급해하지 않으려고요.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용을 써도 달라질 게 없다면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 작가님의 라디오를 그리워하게 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혹 영화 팟캐스트를 재개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 그럴 여력까지는… 대신! 블로그에 ‘시네필 스타터 키트’라는 산문을 비정기적으로 올리려고 합니다. 제목은 사실 어그로인데요. 저를 도와주고 지켜준 영화들에 대해 구구절절 영업과 옹호의 말을 써볼까 합니다.
─ 어떤 작품을 소개해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 제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어주신 분들은… 생각이 많아서 잠 못드는 밤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제가 그랬듯이요. 위로가 되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요. 지금까지 쭉 해오던 일이 방법만 조금 바뀔 뿐이에요.
─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씀이 있으시다면?
─ 음, 지난 몇년 간 좋은 일 놀라운 일을 여럿 겪어왔습니다. 저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동시에 갈피를 못 잡고 뒤죽박죽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고도 느끼고 있어요. 앞으로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중심을 딱 잡고 잘 살아보겠다 하는 다짐은… 실패하겠죠, 또. 그래도 본업에 충실한 이수완이 되어보겠습니다.
─ 작가님의 본업, 독자로서 기대하겠습니다.
─ 응원 감사합니다.
─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시죠.
─ 좋습니다. 지면 땜빵해야 할 때 또 불러주세용.
인터뷰를 마친 수완은 잡지사 건물을 나와 평일 한낮의 거리를 걸었다. 다가오는 여름은 관측 사상 최고 기온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했다.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벌써부터 햇볕이 심상치 않았다. 이게 다 육신이 존재해서 괴로운 거야. 막상 영혼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살고 있지도 않은데. 나를 해하지 않고 남을 해하지 않고 살아남기 참 어렵다. 이것저것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운이 따라주면 가끔 재미도 보고) 일상을 힘껏 꾸려가다가도, 어느 순간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무서워.
중쇄를 찍고 넷플릭스와 영상화 계약을 맺고(헉, 꿈을 너무 크게 꾸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도, 누군가는 나를 절대 제대로 된 한 인간으로 봐줄 리가 없고(이젠 원하지도 않지만) 불안에 떨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슬퍼. 그래, 나는 슬프다. 기쁘고 좋은 일이 앞으로의 내 생에서 아무리 많이 일어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피폐함은 갖은 용을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아니, 나는 원래 이런 것에 무덤덤한 사람이지 않았나? 발뒤꿈치를 한껏 들어도 지하철역 전광판에는 손이 닿지 않을 거고, 내 거추장스러운 몸은 경이를 맞이하기엔 지쳤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맞닥뜨릴 변화가 경이이리라는 근거는 있나? 그런데 미련이 이렇게 가득해서는… 도무지 포기할 수가 없는데.
수완은 계속해서 걸었다. 머릿속은 삶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지만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그는 평생 동안 알아서 자신을 멈춰세우곤 했었다. 그런 결정은 이제 그만해야 해. 그는 정처없이 걸어 시장통에 들어섰다. 사방의 활기가 그를 덮쳐왔다.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셨던 이자카야, 하이볼을 테이크아웃 컵에 담아 파는(그리고 그 맛이 제대로인) 카페, 항상 손님이 많은 분식집. 과일의 단내, 채소가 머금은 풀과 흙 냄새, 정육점의 누린내, 수산물의 비릿하고 짭짤한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악취.
잔뜩 살아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두려워서 외로웠다. 내 불행은 몇 년 형일까, 무기징역인가? 애초에 형기가 한 오백 년쯤 되어서 감형을 받아도 소용이 없나? 운이 좋으면 구십 살쯤에 출소하겠지? 그동안은 제정신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가능한 일인가, 그게. 수완은 충동적으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고 진료 예약을 잡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누가 알아듣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더 멀리 끝까지 가서 숨어있어야지. 아무도 모르게, 사실은 모두가 알게.
그는 집 방향 지하철을 탔다. 내려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몇 있어도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지금 당장 이걸 해야겠으니까. 까치발을 하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전광판. 조심스럽게 점프를 한 번, 두 번, 반복하던 그가 탄성을 냈다. 찰나의 충격으로 손톱이 얼얼했다. 용 쓰면 되는 일이 간혹 있군. 비로소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
소설가 이수완은 한동안 칩거 생활을 했다. 체감상 그가 제일 쏠쏠하다 여겼던 강연이나 영화 GV 진행도 맡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글도 영 쓰질 못해서 그는 통장 잔고를 성실히 축냈다(정작 돈 안 되는 시네필 스타터 키트 포스팅은 블로그에 꾸준히 올렸다). 그 사이 골밀도도 축나고 자살사고도 축났는데(후자는 좀 괜찮았다), 영원한 것은 세상에 몇 없기에 또 얼마 지나서는 집을 뛰쳐나와 친구들을 불러내 앓는 소리를 해댔다. 수완은 허우적대면서도 어찌저찌 삶을 이어나갔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 아무래도 저에겐 생존이 본업이고 글쓰기는 부업이라, 본업에 충실한 시간이 길어져도 놀라지 마세요. 우리는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에요. 다음 인터뷰 때는 정말로 신간 소식을 들고 올게요.
목이 메인다.
─ 감사합니다.
¹ 엘리엇 페이지, <페이지 보이> (반비 출판사, 송섬별 옮김, 2023) p385의 변용
² 체코슬로바키아의 대량학살범 올가 헤프나로바의 범죄(1973)에 대한 서술,
영화 <I, Olga Hepnarova(2016)>를 참고
+ 공모전에 냈다가 떨어진 단편 소설들을 올립니다... 신인문학상을 퀴어링.
++ 프라이드 먼스의 첫 일요일이 이렇게 가는군요. 이번 달의 마지막 일요일에 다른 단편 하나를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