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이랑 나랑 - 철없는 이모의 간접 육아체험
왜? 뭔데?
헌이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말로 바뀌어서 밖으로 나올 때 까지는 입이 일단 나와 있다. 근데 사실 이게 너무 귀엽다. 어찌 그렇게 하나 숨기지도 못하고 다 표시가 나는지... 특히 삐지거나 고민이 많을 땐 확실히 표가 나는 편이다. 그럼 일단 좀 뒀다가 슬그머니 가까이 가서 "왜? 뭔데?" 이렇게 한마디 하면 술술 털어놓는다. 어쩔 땐 닭똥 같은 눈물도 흘려가며 입을 쭉 내밀고 털어놓는다. 실컷 털어놓으면 입은 좀 들어간다.
그날도 그랬다. 일주일에 한 번 나랑 영어 공부를 한다.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고 각자 수준에 맞는 단어를 외우고 내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헌이네 집에 들렀는데 입이 한참 마중 나와 있었다. 언니의 눈치를 살피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고 애는 한참 입이 나와 수도꼭지를 틀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짜식... 그런 얼굴을 하고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으랴. 그리고 언니의 얼굴도 더 이상 받아줄 힘이 없는 얼굴 같았다. 결국 이모는 오늘 운동이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운동을 가자 졸랐다. 가기 싫다더니 "너 그럼 키 안 커. 살만 찐다?" 하니 어기적 거리며 따라나선다. 그 와중에 키는 크고 싶은 모양이다.
산책로에 들어서서 물었다. "왜? 뭔데?" 친구랑 싸웠단다. "친구랑 맨날 싸우잖아. 새삼스럽게 뭘..." 13살 여자애들이 은근 자주 싸운다. 어떤 날은 화장실 같이 안 가서 싸우고 어떤 날은 나 말고 옆에 애랑 더 길게 이야기했다고 싸우고... 나도 그랬나 싶을 정도로 싸운다. 근데 오늘은 다르단다. 친구랑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가 A라는 보이그룹을 좋아한다 했단다. 자기도 그 그룹에 관심이 있던 터라 나도 좋더라 했더니 그럼 CD는 샀느냐, 팬 카페 가입은 했느냐, 조공은 해 봤느냐, 그 가수 생일은 아냐, 고향은 어딘지 아냐 등 질문을 하더란다. 그러면서 "너 원래 강다니엘 좋아하잖아. 맘이 변한 거야? 한 가수만 좋아해야지. 지금 니 핸드폰에 강다니엘 사진 지워!"그런 이야기를 했단다. 순간 당황해서 시키는 대로 사진도 내렸는데 이게 맞는 건지 속상하단다. 결국 오늘도 엄마랑 이모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싸움을 하고 온 거다.
한참을 발까지 동동 거려가며 자기의 억울함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자기는 강다니엘도 좋고 그 그룹도 좋은데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연예인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용돈으론 그 많은 활동을 할 수도 없는데 그럼 자신은 가수의 팬이 될 수 없는 건지, 나는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건지, 친구가 좋아한다 해서 공감해 주려고 검색까지 해가면서 그 그룹 멤버들 이름도 외우고 나이에 고향까지 외웠는데 친구는 왜 자기 맘을 몰라주고 오히려 몰아세우는지 화가 났단다. 마음속으로 너무 크게 웃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저리 속이 상한데 내가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고 꼭 참았다.
"이모가 CD 사줄까? 갖고 싶어?" 한참을 고민하더니 "근데 이모, 우리 집에도 CD플레이어는 없고 그 친구도 CD플레이어도 없어요." 그런다. "그래? 요즘은 대부분 그렇긴 하지. 근데 소장을 하고 싶다면 살 순 있지. 근데 너 진짜 갖고 싶어?" 그러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하고 대답했다. 기특했다. 나 같으면 당장 사들고 친구에게 가서 나도 CD 샀다! 하고 자랑했을 텐데... "헌아, 친구랑 상관없이 네가 갖고 싶은 거면 이모가 사줄 수 있어. 근데 그거 아니라면 안 사는 게 더 멋있는 것 같아. 그리고 이모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네가 더 멋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한 명의 가수만 좋아하니? 멋진 음악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장르도 다양하고 가수도 다양하고... 그리고 팬이 돼도 좋아하는 걸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 거지. 그냥 너랑 친구랑 좋아하는 방법이 다른 거야. 친구도 너도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아. 이모는 좋아하는 가수 이름 다 이야기할 수도 없어. 엄청 많거든. 심지어 가수 이름은 모르고 노래만 좋아하기도 해. 그럴 수도 있지. 노래는 나 기분 좋으라고 듣는 거잖아." 듣고 한참을 말없이 걷더니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 방식대로 좋아하는 거란다. 친구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쿨해지는 건가요?" 하고 묻는다. 귀여운 녀석... "그럼, 너 방금 진짜 쿨 해 보였어." "근데 이모... 친구한테 실제로 이 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럼 마음속으로라도 해봐. 언젠가는 입 밖으로 나오는 날도 있겠지. 소리가 안 나고 마음속으로 하는 것도 말이지.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말이야."
입이 쏙 들어갔다. 짜식... "이모, 근데... CD 대신에 지금 에이드 사주면 안돼요?" 한다. 그래 아직은 애기지... 이래서 아직 네가 좋다. 아직 애기라서... 에이드 다 마시고 나면 이모가 했던 말 반도 기억이 안 나겠지만... 입술은 내일 또 나오겠지만 오늘 귀여우니 됐다. 나도 엄마가 아니라 이모라 이렇게 이야기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도 나도 오늘도 좀 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