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감독 Jul 15. 2021

<유산>

(2014년~ 현재)



꿈 이야기를 쉽게 꺼내진 못 했다.


우리는 한 해 전에 계류유산으로 아픔을 겪었고 아내와 나는 임신이라는 주제를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내는 계류유산으로 마무리되었던 첫 번째 임신을 위해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다. 배태기를 아마존에서 직구를 했고, 병원에게 가서 배란일을 받아서 계획적으로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관계 후에는 속설처럼 돌고 있는 말들을 그대로 따라 했다. 예를 들면, 관계 후에 다리를 벽에 세우고 누워있으면 정액이 잘 흘러 들어가 수정이 잘 된다는 설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과학적으로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내가 저렇게 무언가 집중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임신을 준비하면서 아내 답지 않게 너무 계획적이었다. 신경을 많이 썼다. 아마 당시에 37세라는 나이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만 35세만 넘으면 노산이라고 했고 40세가 넘어가면 고위험군 산모로 분류되었다. 나는 아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몇 개월의 노력 끝에 아내는 생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테스트를 했다. 두 줄이여야 하는 테스트기는 두 줄이긴 했는데 한 줄이 아주 희미했다. 아내는 이것으로 또 검색을 시작했다. 희미한 줄도 두 줄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희미함이 나타내 듯 임신이 불안전하다는 것인가. 하지만 검색만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 주말에 우리는 산부인과를 갔다. 선생님은 임신이라고 했다. 아내는 감정적으로 표현이 분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좋다고 들뜨거나 나쁘다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내는 좋아 보였다. 앞으로 계획을 이야기했다. 부모님께는 언제 말씀드려야 하는지 나를 단속시켰다. 10주가 지나야 안정권이라고 했다. 심장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학창 시절, 생물시간에 임신의 과정과 출산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다. 나는 38세라는 나이에 인터넷을 통해서 태아의 잉태와 성장과정으로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출산에 이르러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할 내용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회음부 절개 같은 것이었다. 뭐라고? 거길 자른다고? 미리 적당히 절개를 하지 않으면 파열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적당히 절개를 해서 출산 후에 봉하는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나처럼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나오고 여자 가족은 엄마밖에 없는 나로서는 교육을 따로 받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이때 알았다. 인체 교육과 성교육에서 이어지는 임신, 출산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그것도 ‘아주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여성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남성들은 최소한 여성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내가 임신을 하고 나서 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놀란 사실이 있다. 친구들은 누나나 여동생이 있어서 조카를 둔 경험이 있음에도 출산 과정도 제대로 몰랐다. 출산 당시에 여성들이 겪게 되는 기본적인 고통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에 또다시 놀랐다. 이 부분은 내 친구들이 철저하게 눈치가 없거나 무관심했을 수도 있다. 내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아마 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잘 모를 것이다. 장담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 대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로가 알게 된 사실들을 공유했다. 그 무렵 우리는 인터넷 기사에서 어떤 연예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에 관심을 주기도 했다. 10주가 지나면 부모님께 알리기로 했다. 그리고 7주째부터 병원에서는 심장 소리를 확인하러 갔다. 7주 때에 가서는 들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보통 8주~9주에 듣고 늦으면 10주에도 들린다고 했다. 그다음 주에 병원에 갔다 그리고 그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검사실에는 천장 모서리에 스피커가 달려있었다. 심장 소리를 크게 들려주기 위한 용도다. 우리는 그 좋은 스피커를 통해 백색 소음만 들었다. 아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남자로서 내 감정은 굉장히 미안했다. 아이를 가지고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정신상태를 바탕으로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살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몸에 큰 상처를 내면서 시작한다. 임신 중에는 아파도 약도 먹을 수 없고 호르몬의 변화로 감정이 혼란스러워도 극복은 혼자의 몫이다. 우울증이 와도 임신한 탓이지 넌 ‘진짜’ 우울한 게 아닌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임신해서 그래~ 애 놓으면 괜찮아질 거야.’ 정말 괜찮아지는 것인가?


우리는 의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아내가 눈물을 흘릴 시간을 주셨다. 아내는 서둘러 정리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썼다.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하셨다.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해 주시려고 노력하셨다. 선생님은 계류 유산이라고 하셨다.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산에는 종류가 많았다. 아기집은 있는데 태아가 없는 것은 ‘고사 난자’, 태아는 있지만 심장을 비롯해서 더 이상의 성장이 없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계류 유산’이라고 했다. 그 외 ‘불안전 유산’, ‘완전 유산’, ‘자궁 외 임신’ 등 상태에 따라 불리는 명칭도 다양했다.


선생님은 자연유산의 경우 생성된 태아를 빼내는데 산모가 겪는 에너지의 소진은 출산과 맞먹는 다고 했다. 특히나 정신적으로 더 고통스러울 수 있으니 남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출산한 것과 같이 몸조리를 잘하고 잘 먹고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했다. 산모의 신체는 수개월이면 돌아오겠지만 임신은 산모가 정신적으로 부담감을 좀 덜어내고 편안 해졌을 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해 주셨다. 선생님은 유산은 전체 임신하는 산모 중에 15% 정도가 겪는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많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인데도 쉬쉬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유산을 하면 산모 자신이 뭔가 부족하고, 마치 잘 못 행동해서 유산을 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오히려 유산을 하면 몸을 더 관리를 해야 하는데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을 하게 되므로 몸은 더 무리가 된다고 했다. 아내의 얼굴을 봤다. 고개는 끄덕이면서 초점 없이 멍했다. 선생님은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사람이 장기를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했다. 아무래도 노산에 가까운 나이이므로 임신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신체 기관이 이제 발동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쉽게 생각하면 녹이 슬어 있다가 기름칠을 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유산을 하고 나면 이후에 임신이 잘 되는 보고가 있으니 회복에만 힘을 기울이라고 하셨다.


집으로 왔다. 아내는 계속 울었다. 자기를 탓했다. 일을 쉬었어야 했는지,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아 그랬는지 되묻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컨디션이 제일 중요하니까 잘 먹고 쉬어서 회복부터 하자고 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부모님들께 전화를 하고 있어야 했다. 아내는 자리에 누웠고 나는 컴퓨터 앞으로 가서 유산에 대해서 조금 더 찾아보았다.


임신이라는 전체 단계에서 수정 이후에 착상 실패가 30%, 화학적 임신이 30%, 유산 15%, 출산이 25%였다. 결국 임신을 하고자 하는 부부들 중에서 출산에까지 도달하는 수는 전체에 25%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적은 숫자다. 유산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4명 중 1명만이 출산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내가 검색을 하면서 다양한 여성 질병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자궁 내막증’이라는 것이 있다. 가임기 여성의 10%~15%에 발생하는 흔한 질병으로 자궁 내에 있어야 할 막이 자궁 밖에 생겨서 문제가 되는 병이다. 극심한 생리통이 있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심해진다고 한다. 발병하는 원인도 알 수가 없고 현시점에서 치료도 정밀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수술을 하면 생리통은 많이 완화되고 불임이던 분들이 임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쓴 것처럼 온전한 임신의 경험이나 유산의 확률에서 알다시피 여성들도 관련 지식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이 없다. 자신에게 발병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교육이 아닌 인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해야 거부감이 없을 것 같다. 인체 교육을 통해서 10대 시절에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조기에 병원에서 검진을 받아 문제가 있으면 일찍 치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임신을 준비하는 시기와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서 기다리는 동안에 아내는 나에게 아들이 좋은 지, 딸이 좋은 지 물었다. 난 둘 다 상관없다고 했다. 선배들 말로는 어떤 선배는 아들을 낳았을 때 부모님들께 아들이라고 전하는 순간 외에는 특별히 좋을 건 없다고 했다. 결혼하면서 돈 많이 들고 사춘기도 딸보다 심하게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정말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유산을 하고 이런 공부를 좀 하게 되니 정말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임신을 해서 생기는 대로 열심히 키워야 하는 것이 문제이지 성별은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유산을 경험을 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결혼 10년 차에 아직 실험관을 하고 있는 선배도 있었고, 몇 번의 실패로 포기한 커플도 있었다. 그랬다. 아이는 가지고 싶다고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삼신 할매가 점지해줘야 하나. 그렇게 우리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우리는 누가 먼저 임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쯤 어머니는 가끔, 2세 이야기를 꺼내시곤 했다. 유산이 되고 1주일 후에 내가 부모님께 사실을 알렸다. 부모님은 부산에 살고 계셔서 자주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만의 하나, 혹시라도 서로 전화통화로 말실수가 오고 갈 수도 있고 그게 아내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의 마음이 편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신이라는 것이 심리적인 요인이 상당히 컸다. 유산이 되고 나서 주변에 선배들과 식사 자리가 생기면 형수님들의 임신 경험을 공유받았다. 선배들이 그랬다. 가지려고 애쓰면 안 생기고 어디 놀러 가거나 회식 끝나고 얼큰하게 취해서 관계를 가지면 그게 임신이 잘 됐다고 했다.


이 모든 일이 지난 6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뱀꿈 이야기를 신나게 이야기했고 끝에 아내에게 태몽 아닐까?라고 했다. 아내는 ‘에이~’ 하며 흘려보내는 듯하더니 이내 ‘그런가…’라고 태도를 바꾸었다. 우리는 얼마 전 휴가를 다녀왔었다. 아내도 혼자서 조금씩 떨어지는 컨디션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아내는 갑자기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테스트기로 다음 날 테스트를 해보았다. 나는 되려 괜히 말했나 싶기도 했다. 테스트기는 두 줄을 보여줬다. 하필이면 이번에도 줄 하나가 흐렸다. 아내는 전보다 조금 더 진한지, 연한지 구분하려고 애를 썼다. 그냥 병원에 가자고 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8주 차가 되었다. 병원 가는 날 나는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다. 혼자 가야 하는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또 일이 잘 못 될 경우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병원에 간 아내가 전화가 왔다.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심장소리를 들었는데 검사실 온 방이 쿵쾅쿵쾅 하는 아기의 심장소리로 가득했다고 했다. 그 후에 나도 병원에 가서 심장소리를 들었다. 심장소리는 힘찼고 조금은 빠르게 뛰었다. 그렇게 우리의 가슴을 졸이며 힘찬 심장 소리를 들려준 아들은 어젯밤 아이스크림을 조금밖에 못 먹었다고 삐진 7살이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