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한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법

후남이가 귀남이를 키우는 중입니다.

by 고작


밤공기도 맑고
파란 하늘 아니,
검은 밤하늘도 좋고
모든 게 평화로워요!
오늘따라 달이 예쁘다.
엄마도 예쁘고!
엄마 고마워요.
나를 키워줘서...
당연한 게 아닌데...

- 2024년 일곱 살, 덕분이의 말
기록해야 기억한다 -



내가 임신했을 때 친구들이 말하길 "넌 아이 잘 키울 거야! 슈돌에서 다 해봤잖아!"

그래서 걱정이 많았다. 모든 아이는 다르고 육아에 정답이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려서.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던 동료가 말했다.

"너는 매사에 긍정적인 게 사랑받고 자란 게 티가 나! 집안이 정말 화목했나 봐!"라고 했다.

그래서 고백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살지 못해서.


이제와 처음으로 용기 내서 고백하자면......

나는 욕쟁이 할머니와 살면서 '후남이'로 자랐다.


*'후남이'란? 1992년에 방영된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이름.

등장인물 중 아들 이름은 (귀해서) '귀남이', 딸 이름은 (귀남이 후에 태어나서) '후남이'다.

줄거리는 '남아선호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집에서 태어난 이란성쌍둥이 이야기'로 소개되어 있다.


할머니는 팔 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우리 아빠를 "금이야 옥이야" 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아들손주를 바라셨다.

애초에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라서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엄마는 나를 낳고 닭머리가 든 미역국을 먹으며 서럽게 울었고

그 뒤로 미역국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 역시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늘 체했다.

다행히 3년 후 남동생이 태어났고 귀남이처럼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여자라서 욕먹는 건 그렇다 치고 제일 서러웠던 것은 밥상 앞이었는데.

고기, 생선은 당연히 귀남이의 독차지였고 달걀프라이도 내가 먹는 건 아까워해서

나는 할머니의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먼저 눈칫밥을 먹던 엄마는 내가 일곱 살 때 집을 떠났다가 내가 스무 살 때 돌아왔다.

엄마와 헤어진 날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옷장 속에서 울었던 장면은 기억한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제는 엄마가 몰래 울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참았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일해서 같이 산 날은 기억에 없다. 사진 속에 포장된 사연만 남아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달콤한 초콜릿과 향기 좋은 화장품으로 내 눈길은 끌었지만 마음에 끌림은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울 때마다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했다.

고아원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쟁이 할머니와 귀여운 귀남이랑 따로 사는 건 싫었다.

다행히 일곱 명의 고모들이 나를 끝까지 지켜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고마운 일이다.


아홉 살 때,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어머니가 조용히 방으로 부르셨다.

"우리딸이 네가 글을 잘 쓴다니까 궁금해서 일기장을 봤는데... 네가 엄마가 없는지 몰랐어.

미안한데 앞으로 우리딸이랑 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홉 살이면 지금 덕분이의 나이다.

다시 봐도 너무 어리고 여리고 어른 말을 아주 잘 듣는 어린이. 그러나 눈치는 빤한 때였다.

이후로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죄가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집안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스무 살 때, 다시 만난 엄마에게도 사실은 그리웠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욕쟁이 할머니가 없어서일까, 우리 가족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각자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덕분이는 나의 성장 배경을 모른다.

해맑게 나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면 말문이 막힌다.


어릴 때부터 종종 생각했다.

내가 사랑받지 못했는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한때는 할머니와 살았던 시절을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해졌다.

결국 나의 유일한 보호자로 존재했다. 구박도 눈칫밥도 고마웠다.

할머니에게 들었던 모진 말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아끼게 됐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좋은 말만 해주고 싶고

특히 아이에게는 할머니와 반대로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귀하다, 소중하다, 잘한다, 고맙다, 사랑한다, 헤어지지 말자...

모두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다.


만약에 엄마가 된다면 진짜 잘하고 싶었다.

임신했을 때 내 가족이 생긴다는 기쁨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하나 사는 것도 막막한데 어쩌자고 엄마가 됐을까...

엄마아빠의 사랑을 모르겠는데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까...'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인 남편에게도 나의 부족함을 들킬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이는 순해서 보채지도 않고 해맑게 웃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도 사랑했다. 진심을 다해. 내가 받고 싶었던 다정한 마음을 전했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너는 내 인생의 선물이야, 네 덕분에 세상에 몰랐던 행복을 알게 됐어.


부족한 나와 다르게 남편은 육아하면서 제일 힘들다는 밥 먹이기, 씻기기, 재우기의 달인이 되어갔다.

남편은 아이뿐 아니라 나도 잘 키워내는 보호자였다.

덕분이를 잘 봐줘서 고맙다고 하면 남편은 "나 애 보는 거 아니야. 애랑 노는 거야."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남편의 배려가 든든했다.

덕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고 하면 "우리 기쁘게 만나!"라고 했더니

이제는 덕분이가 학교에 가면서 먼저 인사를 한다.

"엄마! 우리 기쁘게 만나자!" (손하트 뿅뿅~~)


가끔은 덕분이가 나를 키우는 것 같다.

덕분에 좀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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