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나쌤 Jul 02. 2019

영어책 한 권을 외워버리다

영알못 딸이 2달 만에 원서 200권을 읽기까지

나는 월요일마다 밤 늦게까지 세미나를 하고 딸이 자고 있을 때 돌아온다. 그래서 딸은 종종 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전날 못 나눈 이야기를 한다. 지난 화요일 아침이 그랬다. "엄마! 글쎄, 엄마가 읽어준 <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있잖아, 그거 노래가 있는 거 있지!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틀어줬는데 다 아는 내용이었어." (이미 노래가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딸이 에릭 칼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에릭 칼의 책은 보통 엄마들이 좋아한다- 노래까지 들려주진 않았었다.)


Eric Carle의   <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말을 끝내기 무섭게 딸은 졸린 눈을 다 뜨지도 않은 채 노래를 불렀다. " 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I see a red bird looking at me. Red bird, red bird, what do you see? I see a yellow duck looking at me... "  (노래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E0CwqNW8B0c)


책에는 여러 색깔의 동물들이 나오고 'what do you see'와 'looking at me' 구절이 반복된다.


딸은 yellow duck이 blue horse가 되고 blue horse가 green frog가 되고 고양이, 개, 양, 금붕어, 선생님이 다 나올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완곡한 것이다. 그러더니 노래를 틀어보라고 했다. 자기가 부른 순서가 다 맞을 거라나. 학교 보낼 시간이 다가와서 등교 준비부터 하려고 하니 얼른 유튜브에서 노래를 찾아보라고 닦달하기까지 했다. 결국 노래를 찾아서 틀었더니 한 소절 끝날 때마다 "여기까진 맞았고~"를 추임새처럼 넣었다. 놀랍게도 딸은 노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불렀다. 그건 책 한 권을 외운 것과 같은 거였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베스트셀러가 있는데 울 딸은 영어 배운 지 3개월 만에 벌써 해버렸다~!)


Brown Bear~와 함께 읽었던 다른 책들. 책 읽고 나면 딸이 별점을 주는데 Brown Bear는 최저점이었다는 건 안 비밀!


만약 딸이 다섯 살이나 여섯 살 때, 이 노래를 외우라고 딸에게 시켰으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시간은 또 얼마나 걸렸을까. 10살인 딸은 노래를 외울 생각도 없었는데 너무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노래를 외웠고 부르면서 즐거워했다. 흔히들 언어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늦어도 7살 전에 영어를 접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으며, 최근 연구 경향은 9~10살이 외국어 배우기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기사 참고 http://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502500142) 캐나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캐나다 아이들이 프랑스어를 배울 때, 7살에 4,000시간 걸려서 배우는 것을 10살 아이들은 2,000시간 만에 배운다고 한다. 학교에서 영어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학년을 3학년으로 잡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어느 엄마표 영어 하시는 분의 블로그 포스팅이 생각난다. 태교부터 영어로 시작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영어동요를 틀어줬고, 말도 영어로 걸어줬으며, 영어책을 읽어줬더니 7살이 되니까 스스로 영어책을 읽더라는 것이다. 그 영어책의 수준이란 "I see a white dog." 수준이었는데, 그것은 내 딸이 영어책을 접하고 일주일 만에 읽은 것과 같았다. 7년간 '그' 엄마가 열심히 수고한 거에 비하면 난 거저 한 셈이다.


거저먹기- 공짜가 영어로는 'FREE'인데, 난 아이의 영어에서 엄마가빨리 자유로워(FREE) 지는 것이 적기교육에서 가능하다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좋아한다면 엄마가 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걸고 영어로 동요를 같이 부르는 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엄마들이 얼마나 될까? 꼭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집안일 하면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숨 돌릴 시간조차 없을 때가 태반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독박 육아와 경력단절로 우울에 빠지기 쉬운 상황에서 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걸고 동요를 불러줄 수 있을까? 영어가 자연스럽지 않은 엄마라면 아이에게 영어로 말걸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영어회화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냐는거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하게 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엄마표 영어가 과도하게 요구하는 게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책과 영어동영상, 영어동요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자료들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을 몇 군데씩 돌거나 사이트를 검색해야 하고... 그나마 몇 년 전에는 한글 떼고부터 영어책 읽어주라고 해서 그래도 준비할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은 태교부터 영어로 하라고 하니 정말 '헐~'이다.


시중에서 잘 알려진 엄마표 영어를 충실히 하기엔 난 귀찮다. 'Can't be bothered'는 '귀찮다'는 뜻.

나는 게으르고 귀찮다. 사실 내가 게으르고 귀찮은 사람이 아니라 (나는 30분 단위로 일정을 만들어서 지키는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제쳐두고 아이의 영어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올인하는 것에 게으르고 귀찮을 뿐이다. 잠깐 영어센터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말 아이의 영어를 위해 열심인 엄마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열심이, 아이에게 투사되는 욕망인 것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을 때, 그래서 부모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욕망이 아이에게 투사될 때, 아이들이 괴로워하고 엇나가는 걸 우린 수도 없이 보지 않았나. (얼마 전 온 국민이 난리도 아니었던 SKY 캐슬이 이 부분을 정말 잘 보여줬다고 생각 한다.)


부모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사하면서 생기는 비극을 보여준 SKY 캐슬

아이에게 내 욕망을 투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와 아이를 분리하고, 나 자신을 위해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시중의 많은 엄마표 영어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아이의 영어에 올인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엄마들도 모르게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도서관을 몇 군데씩 돌면서 영어책 빌리느라, 집안일 하면서 틈틈이 노래 불러주고 책 읽어주느라 엄마들은 쉬지도 못한다.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아이 영어를 위해 한 것들이 있으니, 내가 투입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잘 따라와 주고 영어도 느는 게 보이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때 엄마들은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나는 게, 그래서 애들을 잡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아이도, 엄마도 행복한 엄마표 영어는 과도하게 엄마의 에너지를 쏟지 않고 아이도 자연스럽게 즐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건 아이에게 맞는 방법으로 적기에 시작할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전 04화 영어 만화에 자막 없이 퐁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