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 딸이 2개월 만에 원서 200권 읽기까지
어제 아침, 평소보다 좀 일찍 일어난 아이와 뒹굴거리다가 새로 빌려온, 그러나 아이에게 외면받은 리더스북 리틀 크리터 (Little Critter) 시리즈 읽기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외면받은 이유는 단순히, 같이 빌려온 강아지 이야기 비스킷(Biscuit) 시리즈보다 그림이 예쁘지 않아서다.) “어제 이거 읽었는데 재밌더라, 읽어줄까?” 아이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둘이 비스듬히 누운 채로 리틀 크리터 책 중 하나인 <What a good kitty>를 들고 읽어줬다. (원어민이 이 책 읽어주는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Qg80D5D4vw)
“I have a good Kitty. She likes to sleep. I like to play. She likes to play. We play chase. My kitty is hard to catch. I trick her with some milk. Then I catch my kitty. She messes up my dad’s newspaper. Dad says, “Bad Kitty!” … Oh, no! My kitty is in big trouble. Dad puts my kitty outside. My kitty is mad. She runs up a tree. The tree is very tall. My kitty can’t get down. She cries and cries. Dad feels bad and climbs the tree. But he can’t reach my kitty. Dad gets stuck, too. Mom calls the fire department. They come with a big fire truck. Fireman Joe saves my kitty and my dad. …” (전체 내용의 1/3에 해당하는 분량만 옮겼다.)
3개월 전, 처음 아이에게 읽어줄 책을 도서관에서 고를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나 빨리, 저 정도의 책을 별다른 설명이나 해석 없이 읽어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몰랐다. (처음 고른 책은 한 장에 한 문장씩 6쪽이었으니.) 당연히 되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지만,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고 아는 단어라곤 과일과 색깔, 동물 몇 개 밖에 없었던 아이가 3개월 만에 이런 책을 깔깔거리며 읽는다는 게 감동스러웠다. (물론 물리적으로 소리 내서 읽어주는 건 나다. 파닉스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니 당연히 읽어줘야 한다. 소위 집중듣기라고 하는, CD나 MP3로 음원을 들으며 읽는 것 대신 엄마 목소리 들으면서 읽는 것일 뿐. 참고로, 파닉스를 가르쳐야 하나의 여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국내파 이보영 선생님은 파닉스부터 가르치라고 하는데, 여러 사례를 지켜본 바로는 ‘케바케’ 즉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언제 시작했느냐에 따라 다르고, 아이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이 부분도 나중에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다.)
엄마표 영어의 가장 좋은 점은 ‘학원비가 굳어서’,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아서’가 아니다. 가장 좋은 건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동안 생기는 ‘교감과 애착’이다. 3개월 동안 아이와 함께 영어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가 한글을 떼고 난 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순간순간 느꼈다. 바로 '아이와 함께 책 읽으면서 생기는 교감'이었다. 사실 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귀찮아했다. 아이가 한글을 떼고 난 뒤로 책을 읽어준 일이 거의 없다. 한글을 떼기 전에도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걸 즐기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꾸준히 책을 읽어주었던 것은 아이의 언어능력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그나마 무미건조하게라도 책을 읽어주는 것이어서였다. 정말 겨우겨우 했다. 매일 자살을 생각할 만큼 심한 우울증에 걸려보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한참 자극이 필요하고 놀아주는 게 필요한 시기에 아이에게 책 읽기라도 안 해주면 죄책감이 너무 심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에 꾸역꾸역 책을 읽어주었다.
그런 나였으니, 아이가 읽기 독립을 이룬 뒤엔 책을 안 읽어준 건 너무 당연했다. 그렇게 5-6년 동안 아이와 책을 함께 읽은 일이 없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애착이 어떤 건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잊었다기보다는 애초에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우울한 상태에서 숙제하듯 겨우 책을 읽어주었으니 애착 따위가 느껴지기나 했겠나. 요즘 딸램은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게 너무나 좋은지 피곤해도 매일 밤마다 읽어달라고 한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엄마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영어책 못 읽어주겠다.”라고 잠자리에 뻗어버리는 척하면 딸램은 “딱 한권만 읽어주면 안 돼요?”라고 사정사정을 한다. 그럼 난 못 이기는 척하며 몇 권을 더 읽어주고 아이는 딱 달라붙어 조잘댄다. 그 순간들이 개울에서 반짝이는 물결같이 느껴진다.
엄마들이 엄마표 영어를 해볼까 하면서도 망설이는 지점 중 하나가 “난 영어를 못하는데, 내 발음 안 좋은데”이다. 심지어 어떤 학원에선 절대 엄마 발음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지 말라고 한다(절대 과장이 아니다. 친한 분이 ‘언니가 분당에서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는데 거기서 그렇게 엄마들에게 가르친다’며 나에게 성토하셨다). 정말 어이없는 말이다. (학원 원장 미친 듯이 욕 해주고 싶다;;;) 이미 많은 연구와 사례가 엄마의 발음과 아이의 학습 내지 발음과 상관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엄마랑 책 읽는 시기는 정말 일부이며, 영어를 배우는 동안 아이는 원어민이 녹음한 자료들을 훨씬 더 많이 접하게 되기 때문에 엄마의 발음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거의 없다. 설령, 엄마 발음이 아이에게 영향을 좀 미친다고 치자. 엄마가 영어책을 읽어주면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중요한 ‘애착과 친밀한 관계’를 얻을 수 있는데 그런데도 안 읽어줄까? 엄마가 정 발음에 자신 없으면 Read aloud 동영상 (이 글 앞부분에 링크 걸어둔 동영상 같은 것들) 찾아서 같이 들으면 된다.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다. (참고로, 우리나라가 유독 유창한 ‘미국식’ 발음에 집착한다는 거. 영어에서 '중요한 건 발음이 아니라 콘텐츠'라는 걸 알면 좋겠다. 이 부분도 언젠가 이야기할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엄마가 해 줄 수 있다면, 난 최고의 선물 중 하나가 함께 책 읽기가 아닐까 싶다. 요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매일 밤마다 아이와 함께 책 읽는 그 짧은 시간이 지금은 하루의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3개월간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고 깨달아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