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 딸이 2달 만에 원서 200권 읽기까지
딸램은 대략 다섯살쯤 혼자서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전에도 썼지만, 난 아이가 돌때부터 심한 우울증세를 보이기 시작해서 세 살까지 우울증의 정점을 찍었고, 다섯살 때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그래서 아이의 다섯살 이전의 모습은 거의 기억이 안난다. 그나마 페북이 과거의 오늘에서 내가 조금 제 정신일 때 올려둔 아이 사진을 보여주어서 기억하는 게 아이의 어릴 적 모습의 전부다).
아이랑 한창 놀아주고 애착을 쌓아가야 할 시기에 너무 우울해서 손도 까딱이지 못할 때 정말 죽을 힘을 다해 한 것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효과음이라든지, 성대모사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무미건조하게 읽어주는 것도 힘든데 무슨. 나중에 아이에게 “엄만 나한테 해준게 뭐냐”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남아있지도 않은 힘을 다 끌어내서 해 준 게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 것이었다. 적으면 하루에 1-2권, 많으면 5-6권 정도를 읽어준 것 같다. 내가 힘든 걸 아이도 알았는지, 아이는 책을 읽어줄 때면 귀기울여 들어주었고 기특하게도 혼자 글씨 읽는 것을 터득해서 읽기 독립을 일찍 이루었다.
딸램이 여섯살이 되던 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왔다. 그 전까지 살았던 동네는 시내 중심가여서 주택이 별로 없었고 당연히 아이와 갈만한 곳도 없었다. 근처 대학 캠퍼스를 공원삼아 돌아다녀야 했는데, 다행히 작은 도서관이 하나 생겼고 갈 곳 없는 나와 딸은 그 도서관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아이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기운 없는 채로 있어도 괜찮았고, 내가 뭘 안해줘도 아이는 혼자 책 세상에 빠져들었으니 도서관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부터 도서관 문 닫을 때까지 1-2시간 가량 매일같이 도서관에 갔으니 아이가 읽은 책은 꽤 많았다.
어쩌다 헌책을 지인들에게 전집으로 얻어오면 딸램은 앉은 자리에서 30-40권이 되는 책을 다 읽어버리곤 했다. 학교 들어가서도 아이는 책 많이 읽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 1학년 때 이미 3-4학년 수준의 책을 읽었다. 그 무렵 교회에 기증받은 책이 수 백권 들어왔는데, 딸램은 얼마 안되어서 거의 대부분의 책을 다 읽어버렸다. 그렇게 읽은 책들 덕분에 영어책 읽기가 수월해졌다. 요즘 내가 아이에게 읽어주는 영어그림책들 중에 이미 한글 책으로 읽은 책들이 많았던 것이다. 일명 쌍둥이책, 페어북(Pair Book)으로 불리는 책 덕분이다.
엄마표 영어 관련 도서나 블로그에서 자주 등장하는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딸램에게 보여주면 딸램은 종종 “어, 나 이 책 읽어봤어!”라고 했다. 난 영어로 읽어준 적이 없는데 (당연히 없지, 빌려오는 책은 다 처음인데!!!) “언제?”라고 물으면 딸은 당연한 듯이 “학교 도서관에서 한글로 읽었지.”라고 대답했다. 그림책 작가로 유명한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이 걱정인형을 소재로 쓰고 그린 <Silly Billy>는 글밥이 꽤 많은 책인데도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다 한글책 <겁쟁이 빌리>를 봤기 때문이다.
엄마표 영어를 언급하는 책이나 블로그들에서는 꼭 한글을 먼저 떼고, 한글책을 먼저 읽힌 뒤에, 독서습관 들인 뒤에 영어책을 읽어주라고 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만약에 3학년이 되어서야 아니면, 더 늦게,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야 영어에 노출을 시키려고 한다면, 그때도 한글책만 주구장창 읽힐 수는 없지 않을까? 안 그래도 늦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머리가 좀 큰 애들은 저학년용 리더스북은 유치해서 오히려 더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데 그때도 한글책부터, 그리고 쉬운 리더스북부터 읽힐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럴 때 유용한 게 바로 쌍둥이책이라 불리는 페어북이다.
쌍둥이책을 사용하는 방법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에게도 좋지만 초등 고학년에서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이미 배경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한글로 내용을 파악하면 영어책을 읽을 때 부담이 줄어들고 한정된 단어 때문에 스토리전개의 한계가 있는 리더스북보다 훨씬 재밌는 픽처북들을 접하기 때문에 흥미유발이 훨씬 쉽다. 딸램도 쌍둥이책은 훨씬 더 흥미를 가지고 읽는다. 영어책으로 먼저 본 책이 설령 내용이 유치해도 한글 쌍둥이책을 발견하면 꼭 읽어본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영어책을 찾아주면 한번 읽었던 책이어도 다시 읽는 확률이 높아진다(참고로 딸램은 읽었던 책은 다시 잘 안 읽는, 진정한(?) 다독형 아이다). 영어책에 거부감이 있는 아이에게도 쌍둥이책은 유용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엄마들에게도 유용하다. (독해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니까!)
영어그림책에 도전하는 초기에 읽어줄 만한 책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훨씬 더 많은 목록은 <영어, 10살에 시작해도 될까요?> 책에 사진과 함께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