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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17. 2020

추억을 먹고 싶다.  

아빠가 끓여 준 호박 새우젓 찌개를 추억하며...

밤새 100m 달리기를 한 천장의 쥐들의 소리가 잠잠해졌다. 창호문 밖으로 푸르스름 동이 트기 시작한다. 시골의 아침은 도시보다 더 빨리 내 눈에 담겼다. "꼬꼬 꼭" 알을 낳는 암탁의 비명소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대충 고무줄로 묶고 마당 앞 쪽 텃밭부터 확인한다. 


14가지의 신선한 채소들. 저녁에 땅속 요정들이 나와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어제만 해도 연둣빛 토마토는 수줍게 붉은 기운을 내뿜고 손톱 만했던 깻잎의 잎은 대여섯게 피어나 있다. 옆으로 가시가 잔뜩 난 오이도 -나 여기 있어-하고 고개를 내미니 "너 참 귀엽다." 빙긋 웃었다. 나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사랑했다.

슬리퍼를 끌고 분꽃이 잔뜩 핀 담장으로 고개를 돌리면 며칠 전 보물처럼 찾아놓은 녀석이 자리를 잡고 자라고 있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놀린다는 노래도 있었으나 나는 호박꽃을 예쁘다 생각했다. 노란 꽃이 쪼글쪼글 진 자리에는 동그랗게 호박이 바람 넣은 풍선처럼 하루에 하루를 더해 배를 불러갔다.  

'아빠 일어나시면 말씀드려야지^^' 빨간 고무 대아에 물 한 바가지를 떠다 강아지 물그릇에 주고 방으로 들어온다.


부모님께서 쉬시는 주말 아침. 아빠도 일어나셔서 텃밭을 둘러보신다. 1층과 2층 계단형 밭에서 아빠는 양손에 아침에 먹을 고추와 상추, 깻잎을 따신다.


"아빠 호박이요... 호박이 컸어요. 오늘 호박찌개 해주세요."

"어제 봤는데 아직 이던걸~ 일단 가보자. "


아빠는 보물찾기 선수시다. 점찍어 놨던 아이에게서 불과 30cm 떨어진 곳에 내가 본 것보다 좀 더 큰 호박을 발견. 진한 연둣빛과 녹색을 섞어 놓은 호박은 이제 뚝 끊어져 내 손에 쥐어졌다. 나는 지하수로 호박을 빡빡 씻어 아빠께서 계신 주방으로 들어간다.


몸살이 난 엄마는 아직 방에 누워계시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카레를 국으로 알고 자란 우리는 아빠가 주방에 계신 날을 더 좋아했다. 그건 지금 당장 말씀드려도 엄마가 이해해 주실 거다. ^^ 뭉툭한 도마에 호박을 올려놓고 "썩뚝" 탁탁탁~~ 상아색 호박씨들이 알알이 박힌 연한 속살을 내보이며 호박은 냄비로 굴러 떨어졌다.


"밭에서 파 한뿌리랑 마당에 양파 좀 다듬어 올래?"

아빠의 부탁에 요리 보조가 된 나는 덩달아 바쁘다. 잊고 계셨던 마늘까지 다듬어 대령하니 요리하시던 손이 내 머리로 다라왔다. 쓰담쓰담.


호박, 양파, 파, 고추가 차례로 냄비에 자리를 잡으면 영광에서 친할머니께서 담으신 새우젓을 냉장고에서 꺼내신다. 분명 tv에서 보는 새우젓은 귀엽고 작은 분홍빛이었는데 이 녀석은 붉고 크고 약간 징그럽다. 뚜껑을 돌려 열면 짠내가 확 나서 나는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이 녀석이 야채들과 합방하는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나 이런 애야.'라고 존재감을 드러내니 감칠맛 담당!!  


어른 수저로 새우 건더기 두 스푼, 국물 3스푼, 굵은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마지막으로 재료가 잠길 만큼 물을 넣은 뒤 가스불로 직행이다. 지켜보던 나는 조수로 할 일을 다한 듯 자리를 비켜드린다. 보글보글 국을 닮은 찌개가 매운 향을 뿜어댄다. 찬은 없지만 네 가족이 단란하게 앉아 먹었던 그 음식~ "호박 새우젓 찌개"완성. 어린 나와 남동생은 칼칼하고 매운 음식을 호박찌개로 배웠다. 다른 양념 없이 호박과 새우젓이 메인인데 어쩜 이리 맛있을 수 있을까? 땅의 기운을 담뿍 받은 호박과 야채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새우젓 때문인지 아빠의 손맛인지 알 수 없지만 쌀밥을 두 그릇 뚝닥 해치웠던 그날 아침을 기억한다.


9살 때부터 12살 때까지~ 살면서 부모님께 가장 감사드리는 것 중 하나. 그건 바로 깡시골에서의 생활이었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몸으로 체험했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 그때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아빠께서 끓여주시던 그 찌개를 떠올린다. 그 맛이 잊히지 않아 말씀드리면 바쁜 일 다 끝나고 다음에 다음에라고 말씀만 하셨는데... 이제는 아빠께서 끓여주는 찌개를 맛볼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아픈 아빠에게 끓여드려야 할 "호박 새우젓 찌개"


"아빠~ 나 아직도 그 찌개 너무 먹고 싶어요."

"그러냐?~ 지금 끓여도 그 맛은 아닐 거다... 그래도 아빠 나으면 꼭 해주마."

"할아버지 저도요 저두..."


아빠의 웃음은 슬픔이다. 영상통화 속 아빠가 슬픈 눈빛으로 손주와 딸을 바라보신다. 알고 있다. 꿈같은 일이라는 것을... 추억이라도 후루룩 떠먹고 싶다. 아침마다 텃밭에 펼쳐졌던 그 기적이 아빠에게도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저녁 나는 호박 새우젓 찌개를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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