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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Feb 05. 2021

친정엄마를 이해하는데 30년이 걸렸다

새벽녘,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엄마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오른쪽 팔을 배에 감싸고 누워있는 아들이 언제부터 아팠던 건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니 다행히 열은 없었다. '배탈이 난 걸까?' 아직 멍한 의식으로 지난 저녁 먹은 음식을 떠올렸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많이 아파? 얼마나 아픈 거야? 화장실 가볼래? 아니다 일단 유산균부터 먹고 기다려보자."

끙끙 거리는 아이의 신음 소리가 더 커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약을 먹으러 가면서도 아이의 굽어진 등은 펴질 줄 몰랐다. 


"엄마~ 아파요 아파~" 급하게 유산균을 타 먹이고 거실 소파에 앉아 아이를 안고서 계속 등을 쓸어주었다. 다행히 아이는 화장실에 두 번 다녀오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나 잘 때까지 배 문질러 주세요." 침실로 돌아와 눈을 꼭 감고 있는 아이의 배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배탈인 것 같은데 내일 병원에 가봐야겠는걸.'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아이가 아파서 놀랐던 탓이었을까? 나는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8살 때 배가 무척 아팠던 적이 있었지. 다행이야. 너는 그렇게 아프지 않아서...' 살며시 눈을 감았을 때 내 몸은 순식간에 작아져 있었고 그날의 고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나는 배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일어나 사방을 손으로 더듬었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러다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스칠 만큼 심한 복통에 나는 꺼이꺼이 눈물을 터뜨렸다. 안방에서 주무시던 아빠는 내 울음소리에 먼저 달려오셨다. 


"악몽 꾼 거야? 왜 울어~?" 내 옆에서 잠든 동생이 깰까 봐 거실로 나를 안고 나온 아빠.

"배가 너무 아파요. 배가 아파..."


안방 문을 열고 엄마도 내 곁으로 오셨다. 

"아니 왜 배가 아파? 너 숙제 안 했지?"

"나 숙제했어. 엄마. 숙제했단 말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 그때 당시만 해도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교실 뒤편에 서있거나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겁이 많았던 나는 꼬박꼬박 숙제를 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 가기 싫어서 꾀병이라도 부린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아파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못내 그렇게 묻는 엄마가 야속하기만 했다. 복통은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숙제했으면 학교가"


엄마의 차가운 말에 나는 찍 소리고 못하고 주섬주섬 책가방을 싸서 현관문을 나섰다. 집과 학교는 걸어서 5분 거리. 왼쪽 팔로 배를 감싸고 걷는 걸음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굽어진 허리로 평소보다 늦게 교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후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는 학교에서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으니까...


급성 맹장염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18kg의 작은 여자아이가 수술 침대에 올랐다. 내 손을 마지막까지 잡고 계셨던 분이 아빠였는지 엄마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수술 후 의사는 조금만 늦었어도 복막염으로 더 큰 수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고 아빠는 말씀해 주셨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몇 분 전까지 끙끙거렸던 아이는 복통에서 해방된 듯 평온한 낯빛이다. 

'내가 아들만 할 때 맹장 수술을 받았는데... 벌써 이렇게 아이 엄마가 되다니... '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아플 때면 엄마의 말이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 너 숙제 안 했지? - 나에게 서운함으로 엄마에겐 미안함으로 남아버린 이 말. 나를 씻겨 주실 때마다 내 오른쪽 아랫배에 새겨진 수술 자국을 보는 엄마의 눈빛에서 나는 엄마의 '죄책감'을 읽었다. 그리고 한 번도 엄마에게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엄마 왜 그랬어? 나 너무 아팠어. 나 배도 아팠는데 마음이 더 아팠어. 속상하고 서운했어.'라고 표현한 적이 없었다. 왠지 그 말을 하면 엄마의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맞벌이셨던 두 분이 나를 간호하기 위해 참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먹고살기가 빠듯한 상황에서 입원한 나와 남동생을 누구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한다. 엄마도 실수할 수 있다는 걸... 그때로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엄마는 주저하지 않고 응급실로 달려가셨을 거란 걸 이제는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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