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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Jan 29. 2021

피아노 선율에 너를 떠나보내며...

하굣길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은 두 평 남짓한 구멍가게 앞에 모여 뽑기를 하거나 구슬을 고르기 바빴고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그 옆을 무심한 듯 지나치고 있었다. 시골학교로 전학 온 지 이제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해 멀찌감치 느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너는 학원 안 다녀? 우리 피아노 학원에 가는데..."

"피아노 학원?"


나보다 한 뼘 정도  큰 여자아이가 내 뒤에서 말을 거는 바람에 나는 멈춰 서야 했다. '같은 반이구나  피아노 학원이라... 어차피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을 텐데'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아이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다행히 집으로 가는 길 중간 즈음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니 띵동 띵동 피아노 소리가 대문 담벼락을 넘어 들려왔다. 꾹꾹 건반을 누르는 음만 들어도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이의 피아노 소리와 수려하게 연주되는 피아노 곡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한참을 대문 앞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들어와. 여기야." 


친구가 이끌었을 때에야 나는 그곳에 들어섰다. 누렇게 변한 벽지의 허름한 시골집에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방 하나에 기역 자로 붙여진 낡은 피아노 두 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방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피아노가 보였는데 그 앞에는 여자아이들 서너 명이 붙어있었다. 피아노 연주를 하는 언니를 보는 여러 개의 눈. 그것은  동경의 시선이었다.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 사이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손가락에 반해 나도 자연스레 언니 옆에 서서 피아노 음악을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들었던 곡은 너무도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잠시 피아노 학원에 들렀다 온 나는 그날부터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9살, 한 번도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었던 내가 아침저녁 엄마만 보이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징징거렸다. 


"엄마 딱 한 달만 배울게요. 더 다닌다고 말 안 할게요. 딱 한 달만요. 네?"

"안돼. 나중에 배워. 나중에"


지금 생각해 보면 가난했던 우리 집 사정상 학원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터였다. 안된다고만 말하는 엄마가 그 당시에는 원망스러웠지만 그때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꼬박 1년을 나는 엄마를 붙잡고 학원을 보내달라며 노래를 불렀다. 그 사이 틈만 나면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도 않으면서 학원 대문을 넘나들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엄마는 내가 10살이 되던 해에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셨다. 딱 한 달만 다니라는 조건을 걸면서...


바이엘이라는 책을 한 권 들고 하교 후 피아노 학원을 갔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음계를 따라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가며 "도 레 도 레 도레도... 도레미 도레미 도레미 도... 미레도 미레도 미레도 미..." 엄마와 약속한 한 달은 내가 양손을 같이 치기도 전에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더 다니고 싶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왠지 또다시 투정을 부리면  등짝 스매싱을 날아올 것 같았으니까...


이제 막 피아노를 어루만진 어린 소녀는 그 후 몇 년을 짝사랑에 시달렸다. 친구들이 점점 어려운 곡을 연주할  때마다 나는 담장 너머에 서서 피아노 소리를 듣다 집에 돌아오곤 했다. 다행히 집에는 피아노 건반을 닮은 멜로디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동생이 주지 않아 치고받고 싸웠던 나날이었다. 5학년이 되고 다른 학교로 전학 갔을 때에도 내 마음에는 여전히 '피아노'가 목구멍을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우리 집 놀러 와~ 나 피아노 대회 나가는데 연습해야 하거든. 좀 들어볼래?"

"정말? 너희 집에 피아노 있어? 저기... 나 가르쳐 주면 안 될까?"

"그럴까?"


나의 간절함이 신의 귀를 간지럽힌 걸까? 전학 간 학교에서 친해진 친구가 피아노를 가르쳐 주겠다고 내 손을 잡아주다니... 그 후 나는 친구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기초가 없는 나는 친구가 들려주는 곡들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처음 들었던 '엘리제를 위하여' '사랑의 찬가' '캐논 변주곡'과 같은 곡들이 한곡 두곡 내 손가락 위로 스며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 피아노에 대해서 한 번도 말을 꺼내지 않았던 내가 엄마 친구 집에 따라가 피아노를 쳤을 때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셨다. 학원도 안 다녔는데 어떻게 쳤냐며 천재가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엄마는 그 후 3개월이 지나 피아노 한 대를 내게 선물해 주셨다. 나는 갑작스러운 큰 선물에 어안이 벙벙했다.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이가 나와 살아야겠다며 내 방에 떡하니 누워있는 기분이랄까? 한동안 나는 피아노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피아노가 있으면 피아노를 배웠어야 했건만 엄마는 피아노 책 3권만 주시면서 연습만 하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형편상 어떤 학원도 다니지 않는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아마 엄마가 사주신 그 피아노도  아끼고 아껴둔 비상금으로 사신 게 아닌가 싶다. 임시방편으로 나는 계속 친구에게 기대어 피아노를 배웠다. 기초부터 탄탄하게 배웠으면 좋았을걸... 그 오랜 시간 나를 설레게 했던 피아노는 친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피아노를 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나는 마음만 먹으면 피아노를 배울 수 있고 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 줄 거라는 확신은 피아노가 먼지가 쌓여가도 그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엄마 내 피아노 어디 갔어요? 아니 왜 화분 두 개만 여기 있는데?"

"아... 그거 너 안 치길래  팔았어."

"아니 어떻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팔았어? 어떻게?"

"나중에 그랜드 피아노 사줄 남자한테 시집가. 엄마 바쁘니까 집에 가서 이야기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밝고 명랑했다. 반면 내 목소리를 바들바들 떨려왔다. 이런 게 어딨냐고 그건 내 것이라고,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물건이었다고 왜 나는 엄마에게 따지지 못했을까? 화분이 차지해 버린 그 공간에 철퍼덕 앉아 하염없이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첫 만남이 갑작스러웠던 것처럼 이별 또한 그러했다. 마음이 아픈 건 아니었다. 단지 짙은 후회만 각인되어 피아노 선율을 들을 때마다 명치가 아렸다. 


오늘 아침 피아니스트 정명훈의 모차르트 - 작은 별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3번 플레이하면서 처음 내가 피아노와 사랑에 빠졌던 그날을 떠올렸다. 대문 앞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바라봤던 그 피아노, 반짝이는 빛을 따라  내 귓가에 들려오던 피아노 선율, 차마 누르지 못해 손끝으로 만져보았던 매끄러운 건반들, 작은 감각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에 따라 되살아났다. 


음표 한 무더기가 내 심장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피아노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 상처를 어루만지듯 말이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앞으로 나는 피아노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사람이 아니라 소리로 가슴을 달래야 하는 사람으로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지...


선반을 수놓은 피아니스트의 손사락 춤사위를 보면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MYSk2r9Yq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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