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을 아시나요?
수진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갑자기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가려움에 신경질적으로 왼손을 움직였다. 오른손과 왼손의 거리가 이렇게도 멀었던가? 한참을 뒤적거려도 가려운 오른손은 만져지지 않았다. 아니 왼손도 없었다. 꿈인가 싶어 반대로 왼손을 오른손에 가져다 대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수진은 그제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한참을 방황하던 눈이 암막 커튼에 멈추었다. 커튼과 커튼 사이 푸른빛은 새벽을 뚫고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수진은 몸을 일으켜 가려운 오른손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있어야 할 곳에 손은 없었다.
'분명히 손가락이 가려웠는데... 하아~ 미치겠군'
왼손도 올려 보았지만 오른손과 똑같은 모습만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 20년 전 팔에서 분리된 두 손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지금쯤 땅속에서 썩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진의 뇌는 사라진 손가락을 자꾸만 재생시켰다. 때때로 손가락이 추위에 얼어붙기도 하고 저릿저릿 아프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 모기에 물린 듯 가려움도 분명히 느꼈다. 정신병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환상통"이라는 진단명을 내놓았다. 그랬다. 수진은 20년째 환상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 뭉툭한 부분을 왼쪽 손목에 천천히 마찰시켰다. 뇌에게 '이제 그만 받아들여'라고 확인 시켜 주듯 그 행동을 반복하는 수진이었다. 하지만 가려움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분명히 중지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 사이 딱 그 부분이 가려웠다. 수진은 환상통이 올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소파에는 미진이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미진은 수진보다 5살 위의 언니다. 수진은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며 미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찍 일어났네?"
"손이 너무 가려워서..."
"또 그래? 에효..."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언니가 내 기분을 알아?' 푹 한숨을 내쉬는 언니를 보며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물만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갔다. 미진이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진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20대 초반 교통사고가 났던 날, 그날은 언니의 남자친구를 소개받는 날이었다. 수진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러 곱게 단장한 후 형부가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며 길을 걸어갔다. 약속 시간에 늦어 종종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을 때였다. 사고는 한순간이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수진의 몸은 예전과 달랐다.
낯설고 뭉툭한 양손에는 누런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곁에 있던 미진이 얼룩져가는 수진의 눈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미진의 흐느낌과 수진의 울부짖음이 차가운 병실에 가득 찼다. 그날 이후 수진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학교도 그만두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년을 약에 의존했다. 수진의 세상만 변한건 아니었다. 언니 미진의 세상도 비틀렸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자기를 만나러 오다가 난 사고 때문에 손을 잃었다는 죄책감이 미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미진은 남자친구와 이별 후 결혼도 접은 채 온전히 수진의 손이 되었다.
미진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수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상황 앞에 우연히 자신이 있었을 뿐이라고...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머리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수진은 언니를 미워했다. 사실 지금도 그랬다. '나는 손이 가려워 죽겠는데... 날 보며 한숨이야? 언니는 손이 없는 내 기분을 알아?' 기분 나쁜 울분이 수진을 잠식시켰다. 그때였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문자가 울렸다.
-수진 씨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언니를 향했던 원망이 금세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성훈이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수진은 음성으로 문자를 입력해 보냈다.
벌써 성훈과 연락을 이어온 지 3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음악 감상 온라인 모임에서 만난 그는 밝고 친화력이 좋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40대 후반의 독신 남성이라는 것과 수진과 가까운 지역에 산다는 것, 그리고 오랜 세월 캐나다에서 살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가 없다는 것. 딱 그 정도였다. 늦은 저녁까지 개인 톡 방에서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며 까만 밤을 채워갔다. 무슨 용기가 생긴 건지 먼저 연락처를 물은 건 수진이었다. 이성으로써의 호감이라기보다는 음악 취향이 같은 친구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하지만 상대는 매일 아침 이렇게 "좋은 아침"이라며 호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고 이후 이성을 만나본 적 없는 수진의 얼굴은 문자 하나에 봄꽃 마냥 화사해졌다.
- 수진 씨 지역도 멀지 않은데~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수진 씨 좋아하시는 '앙상블 디토' 앨범 드리고 싶은데... 시간 어떠세요?-
액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이 커다래 졌다. 만남은 수진의 계획에 1%도 포함되지 않은 범위였다. 좋은 음악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데 갑자기 얼굴을 마주하자니... 문자를 읽는 순간 사라져버린 손가락의 가려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수진은 액정이 닳도록 문자만 쳐다보았다. 성훈에게 말하지 못했다. 수진의 양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아니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수진은 휴대폰을 끄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 서랍을 열자 투명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케이스를 열고 알약 두알을 꺼내었다. 수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물과 함께 진정제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오늘은 아무 곳도 나가지 않을 참이었다.
"아침 먹고 산책 나가자. 문 좀 열어봐."
방문을 두드리는 언니의 부름에도 수진은 반응할 수 없었다. 조용히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만날 수 없어. 만날 수 없어... 만나지 않을 거야.' 수진은 주문처럼 중얼거리다 이내 약기운에 잠에 빨려 들어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산허리에 남은 노을이 마지막 빛을 발하며 소멸하는 중이었다. 그때 책상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소리가 귀 밖에서 들리는 듯했다. 성훈이었다. 수진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숨죽여 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수진 씨? 하루 종일 답장을 기다렸는데... 혹시 제가 잘못한 걸까 해서..."
"아~ 아니에요. 몸이 좋지 않아서..."
"약은 드셨어요?"
"네~ 저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수진은 상대방의 말을 차마 다 듣기도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마 그는 수진을 예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할 테다. 수진의 가슴에 큰 바윗 덩이가 올려진 양 묵직해졌다. 천천히 그동안 그와 나누었던 문자 메시지를 하나씩 읽어보았다. '단지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뿐이었는데 왜 자신은 그 문자 하나하나에 설레었던가? 왜 혼자 헛된 의미를 부여했을까? 차라리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야. 이제 문자가 오지 않을 거야.' 늦은 밤까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답도 없는 질문만 길어졌다. 밖에 있던 미진이 몇 번이고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겠다고 협박 섞인 말을 했다. 수진은 오늘 하루만 그냥 두라고 언니에게 부탁하며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같은 시간에 그의 문자가 도착했다.
-수진 씨~-
<다음 편에 계속>